▲김원주 예술인.
최방식
생계 사회운동이 허문 예술의 경계
그의 이른바 '통섭' 예술은 미대(서양화)에 입학하고 풍물굿패 활동을 하며 시작됐다. 봉산탈춤, 고성오광대춤 등을 배우고 익혀 춤꾼이 돼 갔던 것. 그렇게 오랜 세월 수많은 시위 현장을 다니며 민중의 삶을 춤으로 표현했다. 신명이랄까. 즉흥 춤을 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춤을 출 때면 머릿속을 비우죠. 몇 개 화두만 떠올려요. 만신무당굿 할 때처럼 무아지경에서 몸을 움직이는 거죠. 대부분의 길거리 춤은 그렇게 이어졌죠. 삼성궁 가을천제, 2022년 여주 아트스페이스 '다스름'(시민 80여명 참여)에서 열린 도예전(공동) 춤판은 공식 무대 행사였어요. 조명을 받으며 달라진 시선에 애를 먹었지만요."
그림을 그리며 춤꾼을 하던 그가 도예에 발을 들인 건 생계곤란 때문. 대학시절 서울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활동으로 좌경세력으로 몰려 몇 개월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이른바 '노동미술'이 여의찮아 '농민미술'을 하겠다고 여주로 내려왔는데, 목구멍이 포도청. 92년 도자공장 화공으로 취직했다. 3년여 밥벌이 뒤 직접 도예에 뛰어들 생각에 95년 증골로 찾아들었다.
"처음엔 '민중그릇' 옹기로 시작했죠. 소품 생활자기도 했고요. 먹고 살아야 해서요. 제가 도예 2세대쯤 되는데 당시에 생활자기(상업)를 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한데, 돈벌이와 멀어지는 찻사발 달항아리(백자) 등으로 빠져드는 거예요. 찻그릇 등이 왜색이어서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고요. 경남 일대를 뒤져 옛 가마터와 흙을 찾아 재현했죠. 하지만 상업성은 없었죠."
도예를 계속하려고 2002년 대체 생계수단으로 다시 강구한 게 조각이었다. 삼성궁에서 단군·환인·환웅이나 동물상 등 석조를 시작한 것. 지금도 하고 있고, 생계에 도움을 받고 있다. 앞으론 도예와 조각을 결합한 도조 예술도 시도하려고 한다.
"그렇게 연결하고 건너는 예술을 했죠. 얻은 결론은 내 예술엔 장르 경계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맘속에 신명 또는 희열이 생기면 생각이 멈추죠. 장르가 뭐든 표출해 내는 거예요. 그리고 무성영화 보면 소리 없이 동작이 이어지듯, 춤·그림·도예·조각으로 분출된다고 할까요."
'달빛'(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작곡한 프랑스 피아니스트 클로드 드뷔시. 음악, 시, 춤, 회화, 건축, 의상까지 섭렵 '총체예술'을 추구했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문학을 결합한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했다. 혁명이념을 공부하고 무정부주의 잡지에 시와 칼럼을 썼고, 동양 음계·리듬을 서양음악에 접목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은 배우려고 가장 힘쓰는 사람'이라 했던 괴테도 문학가·철학자·정치인·식물학자였다. 종합예술가 김원주가 잡은 큰 줄기 '통섭', 그 가치를 어찌 평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