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관아 터남원 관아가 있던 자리. 1894년 이곳에서 동학혁명군 재봉기가 논의되었다. 현재는 남원문화원으로 사용 중이다.
이영천
이때 감영 사마 송인회가 남원으로 찾아와 전라감사의 서찰을 내보인다. 민관이 힘을 합해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할 방도를 논의하잔다. 우선 전주만이라도 지킬 방안을 찾고 싶으니 혁명군 대표를 만나자는 내용이다. 송인회는 아울러 일본군 동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에 전봉준이 나선다. 전라감영으로 들어간다는 건 어찌 보면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다. 하지만 위급에 처한 나라와 백성에 관한 문제다. 억강부약이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6월 보름 사이에 봉준과 개남 등은 남원에 크게 모였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봉준은 각 읍의 포에 명령하여 읍마다 도소를 설치하고 …(중략)… 그러나 김학진은 …(중략)… 군관 송사마(宋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으로 가 전봉준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대비하자며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약속하게 하였다. (번역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이필(二筆) p197)
이때 박봉양이, 승리감에 취해 경계가 허술해진 혁명군의 틈을 노려 다시 운봉을 차지해 버린다. 함안 군수를 설득해 무기와 군사를 지원받아 민보군과 함께 기습으로 운봉을 점령한 것이다. 군율을 엄히 세우고 천연의 지형을 이용, 철통같은 방어벽을 구축한다. 나주에선 오권선이 공격에 나섰으나 계략에 빠져 크게 패하고 만다.
배후가 온전하다 해도 재봉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 나주와 운봉이 드세게 저항하고 있어 큰 근심거리였다.
일본, 드디어 야욕을 드러내고
무단으로 군사를 들인 일본은 이홍장을 뇌물로 매수하는 한편, 작전대로 8천 병력을 부평과 서울 남산에 분산 배치한다. 전쟁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개혁하고 청과의 주종관계를 청산하라며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해 들어온다.
날마다 한양 시가지를 행군하며 무력 시위를 벌인다. 나라는 힘없는 백성에게나 호랑이였지, 이때 이르러 아무나 빼앗아간다 해도 무방한 허깨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