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다 본 화도돈대와 물 빠진 갯벌, 그리고 삼동암천.
국가유산청
강화는 지정학적으로 한양 도성의 입구에 해당하므로 군사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은 강화도의 방어 기능을 보강할 필요성을 느꼈다.
숙종 4년(1678)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요충지인 강화도의 방어태세 강화를 위해 돈대 축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해 12월에 경석수(京石手) 400명이 강화로 와서 돌을 깨고 다듬어 공사 준비를 했다.
숙종, 강화를 요새로 만들다
숙종 5년(1679) 3월 초에 돈대 축성을 시작했고, 그해 5월 하순에 48개나 되는 돈대를 한꺼번에 완성했다. 황해도와 함경도 그리고 강원도의 승군 8000여 명과 어영군 4300명 이외에 순수 역부 1만3162명, 경석수와 제도석수 총 1100명 등 수많은 인원이 동원돼 80일이라는 단기간에 완성했다. 석재를 마련하는 작업 기간까지 다 합해도 총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은 공사였다.
그후로도 6개의 돈대를 더 만들어서, 모두 54개의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강화의 해안을 지켰다.
이로써 강화는 금성탕지(金城湯池, 쇠처럼 단단한 성곽과 끓는 연못 같은 해자에 둘러싸인 성이란 뜻이니, 방비가 빈틈없이 견고하다)나 마찬가지였다. 5진과 7보 54돈대가 있는 강화는 한양을 지키는 제일선이자 수도 방어체제를 수행할 수 있는 보장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