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
김삼웅
"당시 천도교의 직제는 가장 위에 성사(聖師), 그 아래 교무를 관장하는 대도주(大道主) 및 장로, 도사로 구성되었다. 사무는 대종사 밑에 현기(玄機)·금융·전제(典制)·공선(共宣)의 각 관장을 두었다." (주석 3)
손병희와 춘암은 1906년 9월 17일 이용구 등 62명의 동학당 내부 일진회 무리를 출교처분했다. 이들 중에는 두 지도자의 수족과 같은 인물도 포함되고, 교단의 동산·부동산·재정 등 주요 포스트 담당자들이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수족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내하며 출교를 단행한 것은, 저들이 민족과 종교를 배반·배신했기 때문이다. 신생 천도교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지만, 이로써 동학정신을 회복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손병희는 배역자들을 출교처분한 지 한 달 후 김연국과 박인호의 명의로 전국의 도인들에게 포고문을 발하여 "출교한 이용구 일파에 대한 배교분자로서의 낙인은 물론이요 다른 교부들로 하여금 일진회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주석 4)
대도주로 임명된 춘암은 원래 건장한 체질이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박인호는 10년 동안 천도교의 중심기구인 중앙총부를 안정화하였고, 대교구 설립과 의사원제도 등을 통해 지방 교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천도교는 안정화되었고, 개편 이후 처음으로 교단 차원으로 참여한 3.1운동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비중 있는 역할을 해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포교활동과 함께 교육·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교단을 맡았던 박인호는 교육사업을 확대·발전시켰다. (주석 5)
주석
1> 정을경, 앞의 책, 119~120쪽.(재인용)
2> 박세준, 앞의 책, 99쪽.
3> 앞의 책, 주석 61.
4>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172~173쪽, 두레, 2017.
5> 정을경, 앞의 책,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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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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