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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대도주의 책임 맡아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 19] 박인호는 교육사업을 확대·발전시켰다

등록 2024.06.16 12:09수정 2024.06.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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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 입구 천도교(동학)에서는 이미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밝히고 있다.
봉황각 입구천도교(동학)에서는 이미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밝히고 있다.이양훈
 
손병희가 1906년 1월 5일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했다. 4년 여의 망명을 마치고 귀국하는 연도에는 4만 여 명의 도인과 일반 국민이 환영하였다. 그 사이(1905년)을사늑약이 강제되는 등 나라는 국권을 빼앗겼다.

그가 일본에 머물 때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까닭에, 그의 귀국은 통감부는 물론 일반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서울 다동에 거처를 마련한 손병희는 1월 30일 독립관에서 교인들에게 귀국인사 겸 천도교 창도의 뜻을 밝히고,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비판하였다. 이어서 다동에 천주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교단의 체제정비에 나섰다. 

총 36장과 부록으로 구성된 성문법전인 <천도교 대헌(大憲)>을 반포했다. 이 '대헌'의 작성에는 춘암도 참여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뿐만 아니라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백성들은 한 줄기 희망으로 천도교에 기대를 걸었다. 새로운 도인들이 많아지고 모처럼 활력을 찾게 되었다.  

박인호는 1906년부터 교단의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교단 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2월 10일에 교장·고문실의 고문·고문과원(顧問課員), 2월 27일에는 교서편찬원, 6월 14일에는 중앙총부 금융관장, 7월 24일에는 중앙총부 고문, 7월 26일에는 경도사의 직책을 맡았다. 또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충남지역의 포교활동도 꾸준히 했으며, 교인들에게 일진회와 천도교가 노선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박인호는 이듬해 7월 16일 교단의 차주(次主)가 되었다. 얼마 후인 12월 10일에는 차도주가 되었고, 이듬해 대도주였던 김연국이 시천교로 떠나면서 1월 18일 대도주(大道主)가 되었다. 대도주는 교단의 책임자 위치였는데, 시천교가 분리되는 등 교단의 혼란함을 정비할 인물로 박인호가 선택된 것이다. 박인호는 대도주로 취임한 이후 본격적으로 교단을 개편하였다. (주석 1)

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 지도자 승계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2)

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
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 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
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천도교의 제도화와 박인호의 지도자 계승 과정김삼웅
 


"당시 천도교의 직제는 가장 위에 성사(聖師), 그 아래 교무를 관장하는 대도주(大道主) 및 장로, 도사로 구성되었다. 사무는 대종사 밑에 현기(玄機)·금융·전제(典制)·공선(共宣)의 각 관장을 두었다." (주석 3)

손병희와 춘암은 1906년 9월 17일 이용구 등 62명의 동학당 내부 일진회 무리를 출교처분했다. 이들 중에는 두 지도자의 수족과 같은 인물도 포함되고, 교단의 동산·부동산·재정 등 주요 포스트 담당자들이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수족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내하며 출교를 단행한 것은, 저들이 민족과 종교를 배반·배신했기 때문이다. 신생 천도교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지만, 이로써 동학정신을 회복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손병희는 배역자들을 출교처분한 지 한 달 후 김연국과 박인호의 명의로 전국의 도인들에게 포고문을 발하여 "출교한 이용구 일파에 대한 배교분자로서의 낙인은 물론이요 다른 교부들로 하여금 일진회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주석 4)

대도주로 임명된 춘암은 원래 건장한 체질이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박인호는 10년 동안 천도교의 중심기구인 중앙총부를 안정화하였고, 대교구 설립과 의사원제도 등을 통해 지방 교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천도교는 안정화되었고, 개편 이후 처음으로 교단 차원으로 참여한 3.1운동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비중 있는 역할을 해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포교활동과 함께 교육·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교단을 맡았던 박인호는 교육사업을 확대·발전시켰다. (주석 5)


주석
1> 정을경, 앞의 책, 119~120쪽.(재인용)
2> 박세준, 앞의 책, 99쪽.
3> 앞의 책, 주석 61.
4>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172~173쪽, 두레, 2017.
5> 정을경, 앞의 책, 12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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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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