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출진상1894년 10월(음) 초. 대일본 선전포고 겸 2차봉기에 나서는 동학혁명군을 모습을 형상화한 삼례의 출진상.
이영천
하지만 실제에서 승패는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높은 하늘에서 동학혁명군의 허실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면, 혁명군은 흔들리는 호롱불에 의지해 캄캄한 새벽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정과 무기, 화력, 군사 훈련 및 전술과 전략, 통신, 보급 및 지휘체계 등 어느 하나 우월한 게 없다. 단지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굳은 결기에 군사 숫자만큼은 조·일 연합군을 능가했다.
실질적 재봉기
권한을 위임받은 전봉준은, 상황을 총체적으로 읽고 있었다. 무엇보다 추수가 갈무리되어야 한다. 또한 뒤늦게 참여를 결정한 북접에게 다소의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무기와 군량미, 군사를 모아 전쟁에 나서는 일이다.
농민군 하여금 굳센 믿음을 갖게 하려면, 김개남의 예언설을 활용할 필요도 있었다. 임실 상이암에 들어간 김개남은 49일설을 예언처럼 퍼뜨리고 있었다. 8월 25일부터 49일째는 10월 14일이다. 마침 추수가 끝나는 때다. 또 다른 하나는 안성과 죽산의 동학군을 토벌한 조·일 연합군이 남하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전봉준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 모든 걸 고려하면 봉기는 10월 초중순이다.
그런 와중에 다른 지역에서 먼저 들썩인다. 전라도와 무관하게 곳곳에서 무장 봉기한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선 실질적 재봉기다. 황해도 해주성이 동학군에 함락되고, 경상도 진주성이 김인배 수중에 들어온다. 조·일 연합군은 해주를 되찾고자 초토사와 소모사를 임명하여 파견하는 한편, 경상도 방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경상도마저 전라도와 같은 기세로 일어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