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이남금강이 화살처럼 꺾인 정점에 공주가 앉았다. 사진 하단 좌측 분지가 이인. 오른쪽 남북으로 긴 협곡의 금강 아래가 효포. 효포와 금강 사이 중간 가느다란 협곡이 우금티다.
공주시청
육로를 통해 공주로 향하는 길은 두 곳이다. 둘 다 고개다. 동쪽 효포 벌판에서 월성산 봉화대 고개인 능티를 넘어 물안주골로 드는 길이 하나다.
서남쪽 우금티가 둘이다. 그 아래 태봉산과 건지산이 요충지다. 우금티에서 곰나루 방향으로 두리봉이 막아섰고 한 가닥이 뻗어 일락산과 봉황산으로 이어지며 봉황산 아래가 충청감영이다. 두 고개 사이에 지막곡산-주미산-철마산이 솟아 골 안으로 금학동을 품고 있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봉화대와 물안주골, 금학동을 선점하는 게 승리의 관건이다. 또한 보급로로써 삼남 대로를 확실하게 장악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화력 열세를 만회하는 방안은 지형을 활용한 은폐·엄폐가 유일하다. 당시 일본군 개인화기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이나 무라타 연발총이다. 화승총에 비할 무기가 아니다.
부대 배치가 이뤄진다. 선봉군은 효포에 진을 치고 봉화산 능티를 목표로, 좌익군은 이인에서 북접과 호응하며 우금티를 견제하고, 중군은 경천에 진을 치고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로 한다.
그때 충청감사 박제순이 공주 백성을 공산성에 몰아넣고, 성벽 위에 늘여 세워 방패로 삼는다. 혁명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한다고 부린 잔꾀다.
봉준은 공주의 경천에 진을 쳤는데 감영과의 거리가 삼십 리 정도였다. 이때 충청감사 박제순은 감영 내의 아전과 백성들을 이끌고 쌍수 산성에 들어가 보호하고 있었다 …(중략)… 제순은 감영을 비워두고 산성으로 피하여 허약한 듯한 모습을 내보여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한편으론 몰래 대포를 매설해 놓고 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275)
동학혁명군도 갖은 방법으로 공주를 기습 공격할 길을 모색하나, 공주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방어 작전을 펴고 있는 조·일 연합군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대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시월 보름 즈음이라. 논산을 중심으로 모여든 각지 동학군들은 차례로 행진하여 북으로 공주성을 향하여 들어간다. 좌편으로는 이인역에 들어가고 우편으로는 노성읍을 거쳐 무넘이 고개를 넘어 효포 길로 들어섰다. 동학군의 형세는 참 굉장하였다. 두 길로 나누어 들어가는 군사는 논산서 공주까지의 산과 들에 동학군 천지가 되고 말았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52 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