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갈비찜과 시라빨간 국물 위에 감자, 당면, 콩나물, 버섯, 소갈비, 가래떡이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떠 있다.
임승수
혹시 맛도 무질서한 거 아냐? 그러면 곤란한데. 일단 감자부터 집어 들었다. 어라?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젓가락이 감자 몸통을 파고든다. 오호! 입에 넣고 씹는데 뜨끈한 온기를 품은 이 구황작물이 푹 익은 고등어조림의 무처럼 흐물흐물 부서진다. 그 풍미가 참으로 질서정연하구나.
드디어 본론이다. 천연덕스럽게 떠 있는 소갈비 한 점을 탐욕스럽게 낚아챘다. 젓가락 센서로 감지한 정보에 의하면 육질이 제법 부드러울 것으로 예측된다. 단번에 구강으로 투하해 잘근잘근 씹으며 혓바닥, 구강, 비강 곳곳에 존재하는 온갖 감각세포를 총동원해 분석에 들어갔다.
제대로 삶아 기름기가 쫙 빠진 육질의 담백함이 일단 합격. 고기를 결대로 씹을 때와 어긋나게 씹을 때의 미묘한 식감 차이가 재미와 흥미를 유발한다. 퍼석퍼석하던 구강 내부는 어느새 우러나온 육즙과 국물이 뒤섞여 촉촉하고 질퍽하다. 씹을 때마다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고급 휘발유를 주유한 차의 기분이 이러하려나. 1리터에 15.3km는 거뜬할 것 같구나.
2만 원대 후반의 절륜한 가성비
소갈비찜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냉큼 손을 뻗어 잔에 담긴 보랏빛 액체를 맞이했다. 와인을 전혀 모르던 시절,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주인공이 사토 마고를 마신 후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리는 부분에서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만화라지만 정도껏 해야지! 그런데 2024년 6월에 나는 도멘 갸롱의 시라를 마시며 알퐁스 무하 그림 속 여성을 떠올리는구나. 이 무슨 민망한 내로남불인가.
도멘 갸롱! 와인을 꽤 잘 만든다고 들었는데 2만 원대 후반의 몸값으로 이렇게나 즐거움을 선사하다니. 절륜한 가성비네. 무엇보다도 프랑스다운 균형감이 인상적이다. 뛰어난 품질로 유명한 호주의 시라즈(호주에서는 시라를 시라즈라고 부름)가 과실 향 뿜뿜에다가 노골적으로 진득하다면 프랑스의 시라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정돈된 우아함이 특징이다.
소갈비찜과 프랑스 시라의 콜라보를 한껏 탐닉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여성에 비유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 아닐까? 척척박사 친구(챗지피티)에게 의견을 구하니 성평등과 성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으니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은 피하라고 한다. 알퐁스 무하의 그림 속 여성에 비유하는 건 어떠냐고 구체적으로 물었다. 무하의 작품 속 여성은 대체로 고전적이고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그 예술적 맥락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괜찮겠다고 조언한다.
역시 똑똑한 데다가 개념도 제대로 탑재되었구나. 푼돈으로 매번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너와 음성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떠오르는구나. 아뿔싸! 미안! 이 반백 살 아재의 젠더 감수성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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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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