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에 유실된 축대, 쓰러진 지주대, 꼿꼿한 백합
김은상
새벽 다섯 시, 침울한 색깔로 먼동이 밝아오고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요란하게 흔들린다. 거짓말처럼 잦아든 빗줄기가 믿어지지 않지만, 밤새 헤집어진 마음이 심란하여 밖으로 나섰다.
물러진 땅 때문에 텃밭 지주대가 쓰러지고 옥수수 몇 대가 누워 있다. 계곡 건너 축대와 도로가 무너져 있고, 굽이치는 물길 속에서 굴러 내린 바윗돌은 철계단에 처박혀 있다. '이게 물폭탄이구나!' 끄응하고 신음이 새어 나온다.
휴대전화엔 하릴없는 호우, 산사태, 홍수, 침수 경보가 더께처럼 쌓였다. 비가 그치니 TV에선 피해 속보, 날씨 특보가 속속 나온다. 우리 동네 강우량은 시간당 60mm, '양동이로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인근 지역엔 시간당 100mm가 훨씬 넘는 물폭격을 받았으니 오죽할까?
행정안전부는 호우 위기경보 수준을 '주의'에서 '경계' 단계로 상향하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1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지켜주겠다는 것인지, 지켜보고 있겠다는 것인지. 어쨌든 폭우가 지나가니 격이 올라갔다는 소식이다.
세상을 벌할 것처럼 내리던 비가 그쳤다. 사라진 것인지, 자리를 옮긴 것인지. 이것이 마지막인지, 이제부터 시작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제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워져 마음이 고단하다. 놀랍게도 백합은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우뚝하다. 긴 장마에 모두 백합 같은 운이 따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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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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