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상동학혁명 1백주 년(1994)을 맞아 제작한 동학농민군상. 화승총을 들고 진격하는 결기 가득한 모습에 숙연해 진다.
이영천(동학농민혁명기념관촬영)
이때 나라는 나라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어떤 경우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군하며 내세운 명분이 '소수의 자국민 보호'였다.
조선이란 나라는 그런 군대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군 지휘권을 서슴없이 넘겨줘 버렸다. 배(舟) 모양의 공주를 둘러싼, 높다란 산허리에 맞닥뜨린 수만 농민군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구와 청주로 남하하는 일본군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병참선과 통신선을 복구하며 빠르게 진군, 주변 동학군을 제압해 나간다. 세 갈래 길 중 공주로 진군한 일본군의 임무만 남은 셈이다. 여기에 조선군 최고의 악한이라는 이두황 등의 부대가 결합한다.
무기 성능이야, 젖먹이와 잔인한 야차(夜叉)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싸운다면 결과는 명약관화다. 여기에 무슨 작전이 있을 수 있겠으며, 지리적 요충지 점령이 뭐가 중요했겠는가.
그 결과로, 공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청맹과니 조선 정부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겠으나, 간악한 일제는 이 결과를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도발적으로 일으킨 청일전쟁 이면에 숨겨놓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에 기반해, 동북아 세력을 재편하려는 전쟁. 여기서 가장 큰 피해자는 조선이었고 그 희생의 대부분이 동학혁명군이었다.
10월 23일(음) 능티 전투에서, 혁명군은 무기와 전술 차이를 실감한다.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조·일 연합군의 기본 전술은 무기 사거리를 고려한 방어 위주 전술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백성이 방패막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