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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으로 이거, 거듭 상소하며 국정쇄신 요청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18] 면암이 올린 5조의 차자 내용

등록 2024.07.24 13:24수정 2024.07.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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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최익현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며 의병봉기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다. 모덕사에 세워진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최익현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며 의병봉기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다. 모덕사에 세워진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 신영근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의 호칭을 썼으나 실력이 따르지 않는 위세는 허세일 뿐이었다. 마치 실용성이 없는 숫사슴의 뿔이 칡넝쿨에도 걸리는 장애물이 되듯이, 급변하는 내외정세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듬해(1897)에 면암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00년(68세)에 호서의 정산(현 충남 청양군 북복면 농암동)으로 이거하였다. 가족을 먼저 옮기고 면암은 홍천으로 가서 화서의 사손을 만나고 장담에서 성재의 아들, 도산서원과 퇴계의 묘 참배, 경주에서 이언적의 사당과 옥산서원을 참배하였다. 

정산으로 돌아온 이후 노사 기정진의 신도비문을 짓고, 발길을 호서지방으로 돌려 여러 유학자들을 만났다. 70세 되는 해에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받지 않고 지리산을 유람했으며 경상도로 들어가 조식 남명의 묘를 배알하고 이 지역 유림들을 두루 만났다.

72세(1904) 때에 국가의 상황이 더욱 위태로워지자 임금이 밀유를 내려 그를 불러들이고 궁내부 특진관과 의정부 찬정에 제수하였으나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임금의 거듭된 부름이 간절하여 그 해 12월 초 수목헌에 입대하여 고종에게 5조목의 차자를 올렸다. 그는 대궐 밖에서 엎드려 기다렸으나 고종은 면암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할 수 없었고, 그는 다시 상소하여 떠날 수 밖에 없는 의리를 밝히면서 일화(日貨)를 차관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석 1)
  
면암이 올린 5조의 차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인심이 풀어져 흩어짐은 모두 을미년 변고 이후에 복수하려는 뜻이 없고, 복수하려는 정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복수하려는 뜻과 복수하려는 정사가 있었더라면 민심이 저절로 확인하여 오늘날의 어지러움은 없었을 것이다.

신이 근일에 내린 조칙을 여러 번 보았는데 애통한 뜻이 말 밖에 넘쳐나와 널리 퍼졌으나, 실로 혜택이 아래까지 미침은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폐하께서 한갓 겉치레만 일삼고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정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면암집>)

국난기이면 내적이 먼저 외적의 편을 들고 설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역적의 무리들이 일진회를 조직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선동하면서 매국의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면암이 올린 차자는 다음과 같다.


저 민회(民會, 일진회)라는 것은 여러 불평하는 무리를 모아 결탁하고 잘못을 꾸민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니다. 밖으로는 강한 이웃나라의 세력을 끼고, 안으로는 조정의 정사에 사단을 핑계하여, 임금의 엄한 명령도 모르고, 정부의 대관도 모를 지경이다. 죄수를 마음대로 빼앗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하며, 심지어는 궐문 앞에 모여 우는 변괴까지 있다.

아, 기강이 끊어지고 명분이 없어졌는데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며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들도 모두 선왕의 적자이며 예우로 다스리던 유민이다. 처음부터 화란을 즐기며 기뻐하는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며, 또한 임금을 존대하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없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루아침에 성질이 변하고 마음을 바꾸기는 이토록 극단에 이르게 된 것인가. 


아, 이 어찌 한심스럽고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대체로 저 난민의 무리는 패악하다고 하면 패악하고, 역도라고 하면 역도이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마땅히 처벌해야 하니, 무슨 의심이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정부에서 행하는 일이 화란을 자초하게 된 까닭을 생각하지 않는가.(<면암집>)

면암은 여러 날을 기다렸으나 황제의 비답은 나오지 않았다. 역도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정부의 책임으로 묻는 데 대한 답신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더욱 강경한 어조의 상소문을 올렸다.

지금 신이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린 지 벌써 6일째이다. 신의 말이 옳다면 채납하여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지 않아야 되고, 만약 옳지 않다면 지척하여 죄를 주는 것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옳아도 채납하지 않고 옳지 못해도 지척하지 않으니, 이것은 폐하께서 바로 신을 희롱하는 것이다. 신이 보잘것없으나 또한 수치스러움은 아는데 폐하께서 어찌 신을 가볍게 봄이 이에 이르렀는가.(<면암집>)   

대한제국 정부는 1905년 2월 일본인 메가다 쇼타를 재정고문에 임명하고 화폐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인이 이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모자란 재정을 메꾸기 위해서란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을 서둘렀다. '빚진 죄인'을 만들고자하는 일제의 책략이었다. 면암은 다시 상소를 통해 이 문제를 신랄하게 따졌다.

먼저 외국에서 차관하려면 반드시 전당하는 물전이 있을 것이며, 전당하고 물건은 반드시 토지로 할 것이다. 토지는 폐하께서 선왕으로부터 강토와 인민을 잘 보존하라고 물려받은 것인데,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고자 하는가, 또 차관을 빌려서 장차 어디에 쓸 것인지 신은 모르겠다. 액수를 떠나 차관하는 날이 바로 나라가 망하는 때이다.

진실로 이 화패(貨敗)의 연유를 찾는다면 모두 의부(依附) 두 자가 병이 된 것이다. 성상께서 다른 나라에 의무하는 근성을 끊고 뜻을 확립하여 흔들리지도 굽히지도 말고, 차라리 자주하다가 망할지언정 의부해서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릇 여러 신하 중에 외국에 의무하는 자는 모두 저자에서 죽여 온 나라에 호령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내수하는 방법을 부지런히 힘쓰고 자강하는 계책을 빨리 도모하시라.(<면암집>)


주석
1> 금장태, 앞의 책, 21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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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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