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박홍규)박홍규 화백이 그림으로 표현한 공주 우금티 전투. 용맹하나 처절한 모습 그대로다.
이영천(대뫼마을 촬영)
1894년의 전라도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억압과 질곡, 계급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을 맞아들였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봤으며, 진정 사람으로 대접받는 기쁨을 맛보았다. 당연했으나 과분한 행복이었다.
그런 동학이 나쁜 권력과 악랄한 일제에 맞서 싸우겠단다. 허나 그 길에 기껍게 나서지 못했다. 겁이 났을 수 있다. 아니면 하나뿐인 목숨이 구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앞서 길을 나선 수만 명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렸단다. 그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뤘단다. 모두가 분노한다.
분노는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고통의 발로다. 의롭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그 깊이를 더한다. 결코 처참한 죽임을 보아서만이 아니다. 준동하는 악을 보고 겪었음에도,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 부끄럼 때문이다. 이게 선량한 백성의 참모습이다.
그런 분노가, 전라도 땅으로 후퇴한 동학혁명군과 함께하는 실천으로 바뀐다. 늦었으나, 살아 분노한 자들이 기꺼이 의로운 길에 나선다. 패배가 훤히 보인다. 그럼에도 싸워보지조차 않는다면 그동안 올곧게 살아낸 삶의 염치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형편없는 무기일망정 당당하고 싶다. 전멸해도 상관없다. 싸워야 한다는 당위면 충분하다.
이게 살아남은 자의 심정이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분노다.
불타는 녹두 벌판
11월 13일(음) 김개남 부대가 청주성을 공격하지만, 수천 사상자를 내며 패하고 만다. 열악한 화력과 무기, 성벽에서 쏴대는 무지막지한 포격을 맨몸으로 감당할 순 없었다. 너른 들판에 펼친 진은, 월등한 무기 앞에 맨몸뚱이를 내놓은 형국이어서 전술에서도 큰 실패였다.
김개남은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삼례역에서부터 전봉준과 서로 길을 나누어 청주 길로 들어갔다. 청주 경계에서 청주 병사의 관하 군대를 만나 서로 싸운다. 청주 병이 돌연 백기를 들고 항복하거늘 개남은 문득 의심이 들어 항복한 군사 수십 명을 총살하였다.
이로부터 관병들은 악감정이 생겨 죽기로 대들어 싸워 양군 사상자 수천 명을 냈고, 여러 날 싸움에 개남 군대는 패하여 북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남쪽 길로 향하여 전주성에 웅거하여 관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패한 바 되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54~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