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벽예루살렘이 아닌, 충청도 보은 성족리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있는 '통곡의 벽'이다.
이영천
진안에서 장수를 거쳐 백두대간 등허리에 올라탄다. 가는 곳마다 군사가 합류한다. 12월 5일 무주 점령에 군사가 칠천 명이었다. 그러함에도 해월의 안전은 절대적이다. 길목마다 양반들이 조직한 민포병이 괴롭힌다. 가급이면 싸움을 피하는 게 상책이나 부득이 싸워야 할 때도 있다. 7일 무주를 출발, 8일 설천과 월전에서 민포병과 싸워 이긴다.
충청도에 이르러 영동 황간 남쪽 서수원에 진을 친다. 대오를 나누어 9일 황간과 영동 읍내를 점거한 다음 날, 지형적으로 유리한 영동 용산장터에 주둔한다. 험한 산길을 이동해 온 북접군은 무척 지쳐 있다.
경상도 관군과 민포병, 일본군이 토벌에 나선다. 11일 영동 민포병의 공격을 가볍게 제압하자, 12일 토벌군이 두 차례 공격해 온다. 먼저 중앙 경리병이, 다음은 상주 유격병이다. 북접군은 유리한 지형과 대군의 위력으로 이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다.
곧장 보은으로 빠르게 진군한다. 청산을 지나 16일 보은을 점령한다. 다음 날 저녁 종곡리 북실마을에 진을 친다. 이를 정탐한 일본군과 상주 민포병이 17일 저녁 어둠을 틈타 3방향에서 기습해온다. 최시형 등 지도부가 머문 누청리 김소촌 집을 공격하나 허탕이다.
사망자만 2600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