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생 지사 묘소 앞에서
장소영
공원묘지가 있는 동네는 어째 우리 모녀에게 익숙했다. 집에서 차로 40여 분이나 떨어져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여기는 우리 선생님 집인데?"
아이들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댁이 공원묘지 바로 곁이었다. 그것도 안미생 여사 묘소에 근접한 골목이라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선생님은 1년에 두어 번, 학교 Tri-M(음악우등학생 협회) 회원이나 졸업생을 위한 파티를 집에서 열곤 한다.
덕분에 요즘은 아이들을 선생님 댁에 데려다주는 길에 안미생 지사 묘소에 들르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는 딸에게 말해주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보다고. 안미생 지사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딸이 처음 닿아본 독립운동가가 되셨다.
노스포트에 오기까지
김구 선생의 장남 김인과 결혼한 안미생은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한 인재였다.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자주 옮기며 고된 생활을 하는 중에도 학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3개 국어에 능통했던 임미생은 한국독립단, 임정 비서진 등 특히 임시 정부의 외교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안타깝게도 남편 김인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구 선생 일가가 머물던 중국 충칭의 당시 환경이 너무나 열악해 폐렴으로 고생하다 명을 달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인맥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페니실린을 구해달라는 며느리의 부탁을 김구 선생은 거절했다. 동지들도 고생하는 마당에 아들을 위해 사적인 힘을 쓸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딸 효자가 겨우 네 살 무렵이었고 광복을 불과 다섯 달 앞둔 시점에 김인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해방된 조국을 임시로 통치하던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임정 인사들은 정부 관계자가 아닌 그저 개인 자격으로 미군 수송기를 타고 꿈에 그리던 해방된 고국에 돌아왔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1차 귀국진에 안미생도 있었다. 귀국 후 때로는 김구 선생의 비서로, 때로는 손님을 맞는 안주인으로, 여성운동과 교육에 앞장선 사회운동가로 3년여간 활동했다. 안미생의 알려진 행보는 여기까지이다.
1948년 전후로 안미생의 행보는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미국 뉴욕에 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모두 가려져 있다.
1949년 3월, 귀국하지 못한 형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돌보며 공적인 활동을 이어가던 부친 안정근 지사가 별세하자 안미생은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가 부친의 장례를 치렀다.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을 때 장례 참석차 미국에서 오고자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뜻을 접고 애석한 마음을 전보로 전했다고 한다. 1965년 즈음, 한국에 남아있던 딸 효자를 미국으로 불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뵙는 참배객이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