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 감독의 작업실에서그는 뇌출혈을 앓아 오른쪽 몸이 불편하다.
민병래
이러한 때 김태영 감독이 만든 < 1923 간토대학살 >이 8월 15일에 개봉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원래는 간토대학살 100주년인 2023년에 발표할 계획으로 작업했으나 101주년이 되는 올해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동안 간토대학살을 다룬 좋은 영상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일교포 오충공 감독이 1980년대에 만든 <감춰진 손톱자국>과 <불하된 조선인>도 역사적 작품이나, 한국땅에서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최초이기에 이 작품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김태영은 그동안 5·18을 최초로 다룬 영화 <황무지>(상영금지)를 1988년에 발표하고 미수교상태이던 베트남과 쿠바를 취재하는가 하면 다큐멘터리 제작사 '인디컴'을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다큐멘터리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런 이력을 가진 김태영은 간토대학살을 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를 움직이게 한 계기는 계명대 역사·고고학과 정성길 객원교수를 만나고서다. 정교수는 요코하마항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철사에 묶여 몸통에 막대기까지 꽂혀있는, 간토대학살 때 살해된 조선인으로 여겨지는 사체가 찍혀있었다. 김태영 감독은 이날 작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로 4년여 시간,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장애 3급 판정을 받은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작업일지를 돌아보면 촬영횟수가 모두 77회에 이른다. 일본 출장도 여덟 차례였다. 한 회차 촬영이 하루에 끝난 때도 있고 길게는 7박 8일에 이른 적도 있다. 드론 작업은 필수이고 두 개의 촬영팀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도 했다. 학살을 증언하는 일본의 시민운동가와 진행하는 인터뷰는 2~3시간을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히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나 스키오 히데야 국회의원의 인터뷰 같은 경우는 그쪽 일정을 맞춰야 하니 스케줄이 틀어지기 일쑤였다.
사건 사고도 있었다. 엿장수 구학영이 사망한 사이타마현의 요리이 마을을 촬영할 때였다. 옛거리와 구옥들을 찍는데 갑자기 석 대의 경찰차가 나타나 다짜고짜 김태영을 경찰서로 끌고갔다. 알고 보니 마을 주민 하나가 허락없이 자기 집을 찍었다고 신고했고 경찰은 외국인으로서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끌고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하네다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5시간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날 촬영은 완전히 엉크러졌고 늦은 밤에 숙소로 돌아가 겨우 귀국준비를 할 수 있었다
중요한 특종들
이런 노력을 기울인 덕에 이 영화에는 많은 특종과 귀중한 증언이 넘쳐난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일본 자위대 방위연구소의 촬영분에서 확보한 사실이다. 자위대 방위연구소의 문을 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가? '간토대지진'을 취재하겠다는 요청서를 넣고 6개월 여의 교섭 끝에 겨우 촬영 허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서가를 마음대로 돌아볼 수 없으니 열람을 희망하는 자료를 신청해야 한다. 소장자료 중 어떤 자료가 간토대학살을 담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결국 검색 키워드를 이리저리 짜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도 난관은 또 있었다. 검색어로 추출된 자료 전체를 볼 수 없으니 다시 선택을 해 주어진 시간 내에 훑어보아야 한다.
노력과 정성이 통해서인가? 김태영 감독은 여기서 대어를 낚게 된다. 간토대지진 때 발령된 계엄령 하에서 계엄군이 남긴 전투상보가 그것이다. <공문비고 재해부속 12>라는 책자에서 "15연대가 조선인 3명을 총살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자의 전부와 앞뒤 시리즈물을 전부 복사해 검토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실을 캐낼 수 있었을 게다. 김태영 감독의 카메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도쿄도 공문서관도 찾아갔다. 여기서도 간토계엄군사령부 상세보고서 제5권에서 '재해경비를 위해 무기를 사용한 사건조사표'를 통해 군이 조선인 학살에 가담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김태영 감독의 이 취재가 중요한 까닭은, 일본 정부가 한결같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며 정부 내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없다고 강변하고 혼란 속에서 일부 자경단이 저지른 소행으로 '간토대학살'을 덮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영화 < 1923 간토대학살 >의 미덕은 수많은 증거와 증언을 통해 일본정부의 해명이 거짓임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