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구이와 피노 누아고추장 양념은 자칫 피노 누아의 섬세한 풍미를 덮을 우려가 있어 소금구이와 간장구이를 주문했다.
임승수
음식과의 근사한 궁합을 기대하며 한 모금 마시는데, 호오! 요만큼도 거슬림이 없는 도가적 무위자연의 맛이 새벽 산허리에 둘린 짙은 안개처럼 은밀하고 조용하게 퍼져간다. 혀를 감싸는 압도적 감칠맛. 느긋하게 올라오는 기분 좋은 짭조름함. 그 사이를 슬며시 비집고 들어와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는 미묘한 신맛과 은근한 타닌. 끊임없이 변하는 맛들의 이 여유로운 시차가 참으로 절묘하다. 무릉도원의 선인들이 와인을 마신다면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문득 홋카이도 비에이의 '청의 호수'가 떠오른다. 청록색 수면 위에 주변의 산과 나무가 데칼코마니처럼 비치는데, 그 비현실적 이미지에 눈길을 사로잡히면 시간과 공간 감각이 시나브로 왜곡된다. 아참! 내가 장어구이를 먹고 있던 중이었지? 신선놀음에 도끼 썩는 줄 모른다더니, 와인 놀음에 장어 식어가는 줄도 모르겠네. 와인에 홀려 장어구이와의 궁합 따위는 망각한 것이다.
내추럴을 지향하는 신생 와이너리
이건 6,600엔의 기량이 아닌데? 가격의 몇 배에 달하는 만족감을 얻고 호기심이 들어 와이너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니 2021년에 홋카이도 요이치 지역의 15번째 와이너리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유기 비료를 사용하고, 화학농약을 쓰지 않고, 생태계를 존중해 땅도 갈지 않고 풀이 자라는 땅에서 그대로 포도를 재배한단다. 양조할 때는 천연 효모를 사용하며 첨가물이 없고 필터링을 하지 않는다고. 요이치 땅에서 자란 포도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데, 역시 예상대로 내추럴을 지향하는 신생 와이너리구나.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어설프게 흉내 내지 않는다. 홋카이도 와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담겠다는 철학이 느껴진다. 그 목표를 향한 진지한 노력이 맛과 향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안주 없이 단독으로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 얼마 만인가.
"이게 마지막 잔이야."
"색이 소고기 핏물 같네."
"필터링하지 않는 와인이고 막잔이라 부유물이 많아서 그래."
"오빠가 옛날에 소고기뭇국 끓여준다며 소고기 핏물 빼던 게 생각나네."
맞다. 그때 간장을 너무 부어서 먹기 힘들 정도로 짰는데, 그 탓에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가? 흐흐. 그 짜디짠 국을 아무런 불평 없이 먹어줬던 아내한테도 미안하고… 눈앞의 장어구이 너한테도 미안하구나. 맛으로도 영양적으로도 온몸을 던져 우리 가족에게 봉사하고, 게다가 와인과의 궁합도 좋았는데 말이야.
아내와 건배한 후 소고기 핏물 같은 액체를 마저 비우고 그 소고기뭇국 시절을 되새기며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고 있는데 콧속 와인 향이 여전히 선명하다. 그 유명한 도멘 타카히코 소가도 처음에는 신생 와이너리였지 아니한가. 머지않아 미소노 빈야드 피노 누아를 찾는 사람이 상당히 늘어나 가격이 상승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속 편하게 와인 취미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맞은편에 앉은 아내의 너그러운 '무지성' 음주 덕분에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무지성'이로구나. 소중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내 지성은 스마트폰처럼 잠시 꺼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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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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