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시를 낭독 중인 나희덕 시인 모습. 연세대 인문예술진흥사업단 '현대시 아카이브' 프로젝트 유튜브 화면캡쳐
연세대 인문예술진흥사업단
이리저리 치대어질 운명으로 태어난 빨랫비누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각진 부분이 많이 둥글어졌을 것이다. 이제 막 껍질을 벗어낸 앳된 젊음도 무수한 눈물의 열매를 잉태하면서 더욱 단단히 여물었을 것이고 말이다.
"떨리는 손으로 풀 죽은 김밥을
입 속에 쑤셔 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 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있다.
(중략)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연두에 울다' 중에서)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본 여름 들판의 위안을 떠올리며, 시인은 잠시 환해졌을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서 입에 쑤셔 넣던 김밥처럼 삶은 참 질기면서도, 푸르른 여름 들판에 해사한 빛처럼 눈부셨을 것이다.
만약 들숨과 날숨이 연둣빛이라면, 연두의 계절이 과거에 있지 않고 '지금'에 있다면, 지금 이곳에서 생동하는 우리들의 삶이 곧 연두의 계절일 것이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 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뜨거운 돌' 중에서)
뜨거운 돌을 손에 꼭 쥐고 걸어오는 이를 상상해 본다.그 돌을 누구에게도 던지지 않고 또 한 걸음을 내딛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아마도 이 뜨거운 돌은 표면적으로 세상을 향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분노도 슬픔도 노여움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다채로운 감정, 사랑으로 똘똘 뭉친 뜨거운 돌은 그녀의 손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먹 안에도 들어있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
나희덕 시인의 시가 지닌 깊은 뼈대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작품 "사라진 손바닥", "땅끝", "귀뚜라미", "일곱 살 때의 독서"등을 읽다 보면 삶은 조금 더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의 불씨가 켜진다.
젊은 날의 고통과 휘청거림 속에서 쓴 시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있음으로 뜨거운 감각을 일깨워 준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숨과, 서서히 저물어가는 모든 숨들이 사랑스럽다.
간혹 힘이 빠져 주저앉아도 괜찮다.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눈물을 흘려도 괜찮다. 젖은 땅끝에서 오직 뒷걸음질밖에 칠 수 없다 해도 괜찮다. 5시 44분이 5시 45분에게 나를 넘겨주면서, 점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삶이 문득 두려워져도 괜찮다.
우리는 그 위태로움 속에서도 아름답게 살아있다.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여전히 살아있다. 어떤 모습으로 여기에 있든, 우리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러니 꽃보다도 적게 산 우리여, 그러니 핀 줄도 모르고 피어있듯, 살아가자. 계속.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시인/ 문화예술기획자/
『오늘이라는 계절』 (2022.04, 새새벽출판사)
울산북구예술창작소 감성갱도2020 활동예술가 역임(2022)
『사는 게 만약 뜨거운 연주라면』 (2023.10, 학이사)
장생포 아트 스테이 문학 레지던시 작가(2024)
(주)비커밍웨이브 대표
공유하기
이 사람 시선을 따라가니 나도 더 살고 싶어졌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