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우당 도예 문연임 작가의 작품. 움직이지 않은 도자인형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문연임 작가
- 타국에서 고생 많이 하셨을 것 같다. 어떠셨나?
"고생했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황금기였다. 저는 1960년대 중반 광주광역시에서 4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가정이나 사회는 남성위주였고 남녀차별은 심했다. 우리집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결혼 후 가정 살림하며 아이 셋을 낳아 키웠고 대학에서 시간 강사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이 전임교수가 돼서 좋았지만, 내가 배운 지식이나 재능을 펼쳐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떠난 유학이었다. 경덕진에서 머문 십 년 동안 개인 문연임으로, 하고 싶은 공부와 작업에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며 살던 시간이었다. 도자 작가로서의 욕망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풀었던 것 같다."
원광대학교 미술대학도예과 졸업한 문연임 작가는 중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하여 중국경덕진도자대학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중국 고령세계도자비엔날레 공모전에서 입선했고중국 경덕진·고령·리링 세계도자박람회 초대작가 (2010~2015), 미국오로라시 커뮤니티 컬리지 워크샵 초대작가 외 다수(2014), 프랑스 액상프로방스 페어 초대작가(2019), 청주공예비엔날레, 소사벌국제도예전, 등으로 참가했다. 작품은 중국 경덕진 박물관, 프랑스, 미국 등에 다수 소장돼 있다.
- 유학생활에서 아이들이 작가님한테 도움을 줬다고 하던데, 어떤 도움을 줬나?
"중국인들과 소통이 필요할 때 중학생인 둘째 아이가 동행하여 통역을 해줬다. 중국에서 세계도자기박람회 등 도자 관련 굵직한 행사가 열리면 저는 시상품을 가지고 참가했다. 그럴 때면 중국인들과 소통해야했다. 경덕진시와 중국 기관 관계자나 도자장인을 만나야 하는 자리도 많았는데 그때도 그랬다.
저처럼 외국 여성이 아들 셋을 데리고 도자를 공부하러 온 사례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중국 사람들은 우리한테 우호적이었고 환대해줬다. 당시 세계에서 우리나라 위상이 부상하고 있었고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아이돌 그룹과 K-팝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점도 우리가 중국에서 생활하는 데에 유리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유학 간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 도자인형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언제부터 도자인형을 본격적으로 했나?
"인형 옷 입히기 놀이가 도자인형조형작업으로 이어진 것은 대학 때부터였다. 이후 중국 경덕진 대학의 석사 과정에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인체조형 수업은 문화충격이었고 인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창이 됐다. 예컨대 모든 수업 과정에 남녀노소 누드모델이 등장했다. 이때 모델마다 피부조직 또는 표정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감정이나 표정은 얼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꼬리를 치켜올릴 때와 내렸을 때, 입 모양과 눈의 표정은 말보다 더 강한 전달력을 갖는다. 신체언어, 보디랭귀지라고 하지 않나, 사람의 팔 동작 발 동작 하나에서도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이 나온다. 이를 아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중국의 다양한 전통 회화기법도 배웠다. 이는 내 작업에서 부족한 점을 빠른 속도로 채워줬고 그때마다 나는 자주 희열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과정에서 '내 작품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집약시켜 보자, 사람 이야기, 사람 느낌이 나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작업할 때마다 그 희열과 성취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