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들시골에 살다보면 여러 벌레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만나곤 한다.
김은상
고 김민기 하면 '아침 이슬'과 '지하철 1호선'이 따라붙는데, 나는 그보다 벌레가 먼저 떠오른다. 그가 생전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구한 장르는 아동극이었다.
이 극에는 많은 벌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노래극 <개똥이>는 그가 공개 발표한 마지막 창작물이다. 나는 극 중에서 쇠똥구리와 풀잎들이 부르는 <새벽>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하지만 벌레 이야기가 먹히는 것은 딱 그 즈음까지인 것 같다. 시선이 땅과 가까운 아이들은 벌레를 신기한 동물로 여긴다.
어려선 친근하게 여기고 가까이하지만, 자라면서 이런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교육의 효과일까?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놀이에서조차 위험을 감수하길 꺼린다. 게다가 벌레는 축축하고 지저분한 곳을 좋아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은 벌레 없이 존재한 적이 없었고 존재할 수도 없다. 곤충이 없다면 굶주리거나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테니까.
벌레는 쓰레기를 처리해 주고 해충을 제거하고 토양에 영양을 공급하며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된다. 제비만 해도 부모와 새끼가 한 계절에 잡아먹는 곤충의 수가 약 100만 마리나 된다고 하니 새가 존재하려면 곤충이 있어야 한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아는 것과 교육은 따로 간다. '약 하나 안 친 채소'가 좋은 건 알지만 사람들은 그 채소보다 말끔하게 생긴 것들을 찾는다. 벌레의 척결이 곧 도시화이고 문명사회인 것처럼 여긴다. 맘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없앨 방법만 열심히 고민해 왔다. 생태적 역할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그렇다. 파리가 대표적이다. 파리도 수분 매개자이면서 사체를 먹어 치우고 분해해서 거름으로 되돌려주는 분식성 곤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파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거나 재평가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사라지는 것이 벌레만은 아니다. 다시는 그 시절, 그 공간,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송충이를 닮은 강아지풀로 누군가를 깜짝 놀라게 하던 추억이, 줄지어 제 집으로 먹이를 나르는 개미들을 졸졸 따라가던 뒷모습이, 사마귀가 사마귀를 갉아먹어주길 기대하며 그곳에 갖다 대던 기억도 새로 돋지 못한다.
때론 시간 지나야만 알게 되는, 아름다운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