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피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
서부원
굳이 임피를 택한 이유가 있다.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농업 사회의 전통이 허물어지고 소멸 위기에 직면한 대표적인 농촌 마을이어서다. 게다가 1920년대 일제의 수탈에 맞선 농민 항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임피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가다 보면, 넓게는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고, 좁게는 추석 명절의 미래도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 있다.
본디 임피는 군산을 거느렸던 큰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기 위한 항구로써 군산이 번창하기 전까지는 주변 지역을 통할하던 지방관이 기거한 중심지였다. 일제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와 군산항을 잇는 철길을 건설할 때, 지역의 유림을 중심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할 만큼 항일 의식이 남달랐던 지역이다.
곡창지대였던 만큼 수탈이 유달리 심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대규모 농장이 곳곳에 세워졌고, 총독부와 결탁한 친일 지주들이 활개를 치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인근 군산에는 일제가 세운 수탈 기관으로 사용된 건물이 즐비하고, 일본인 이름을 내건 농장도 곳곳에 남아있다.
명색이 추석 연휴인데 임피로 접어드는 도로는 믿기 힘들 만큼 한산했다. 고향 방문을 환영한다는 도로변 현수막마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인근 농공단지를 오가는 공사 차량의 굉음만이 요란했다. 과거 우리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린 곡창이었지만, 지금 이곳은 논밭을 갈아엎은 자리에 조성한 공장들이 하늘을 가리고 섰다.
고속도로의 귀성 차량은 서울과 지방의 대도시를 연결할 뿐이다. 이미 임피 같은 농촌 마을엔 귀성하는 아들과 딸, 손자, 손녀를 맞을 어르신들이 몇 남아있지 않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언론에서 역귀성이 유행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럴 수 있는 분들조차 거의 없다. 그분들이 살던 집은 흉물처럼 방치되거나 목 좋은 곳이라면 카페 등으로 개조되어 있다.
주민은 없고 마을 이름만 남은 형국이다. 인적이 끊긴 곳에 조상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부러 성묘하는 이들이 있을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묘가 자리한 산으로 오르는 시멘트 길은 입구부터 잡풀만 무성하다. 묘소 주변을 벌초하기 전에 당장 오르는 길부터 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지방자치단체가 발 벗고 나설 일도 아니다.
"지금의 40~50대가 명절에 성묘를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겁니다. 종국에는 매장은커녕 화장해서 유해를 모시는 묘조차도 사라지게 될지 몰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마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던 지인의 말이 실감 났다. 이제 도시마다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도 이미 한계 상황이라며, 성묘라는 단어 자체가 '고어'로 남게 될 거라고 예언했다. 기일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었다가 알림음이 울리면 가족끼리 고인의 삶을 함께 추억하는 정도로 간소화될 게 뻔하다는 거다.
어느덧 추석 명절 연휴는 무더위가 가고 쾌청한 가을날 며칠 동안 가족들끼리 휴가를 즐기는 시간으로 의미가 굳어질 듯하다. 기후 위기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게 될 앞으로는 고통스러운 여름을 견뎌낸 것에 대한 위로 휴가쯤으로 여겨지게 될지도 모른다. 덩달아 귀성과 귀경이라는 단어도 사라지거나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21세기식 성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