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1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옥바라지 골목이 재개발 사업으로 허물어지고 있다.
유성호
빠른 속도로 발전한 나라 한국은 가난의 모양도 빠르게 변했다. 1960년대와 1980년대, 2000년대의 가난은 다르다. 당장에 필요한 끼니와 잠자리에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야 그대로지만, 1960년대의 가난이 판잣집, 1980년대의 가난이 달동네였다면 2000년대의 가난은 마을의 모양으로 유추할 수 없이 각자의 집 속으로 흩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주검이 된 이후에야 '발견'되는 것은 그 까닭인지도 모른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든다고 '디자인거리'니 '뉴타운'이니 '신속 통합 기획'이니 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부터 뽑혀갔다. 빈곤의 자리를 지우는 도시 개발의 문법은 개발로 인해 사라진 것들을 누추하다 여기는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난한 이들을 도심지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 두려운 것, 위협으로 느낀다. 사회의 안전을 함께 쌓아 올리는 대신 각자의 담장을 알아서 쌓고 살기를 권하는 도시에서 생존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 되고 있다.
1995년 한국의 빈곤율은 8.5%였으나 2021년 한국의 빈곤율은 15.1%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그에 합당한 수준으로 모두의 생존이 확보된 것은 아니다. 발전한 나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위기가 없더라도 꾸준히 빈곤을 만드는 사회가 되었다.
15%의 빈곤율이라지만 빈곤의 위험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사람은 이보다 더 많다. 약 40%에 달하는 노인 빈곤율이나 27%에 달하는 장애인가구 빈곤율은 노동소득이 사라지는 순간 빈곤을 면하기 어려운 이 시대 장삼이사들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는 언제나 필요한 수준보다 부족하고, 성장기에 확보한 노동자들의 권리는 경제위기를 빌미로, 혹은 비정규직 도입과 같은 '혁신' 조치에 따라 무너지고 있다.
IMF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한 신자유주의는 사회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도 침투했다. 위기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을 체득하며 살아온 이 시대의 사람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은 타인과 사회를 돌볼 여력이 없다. 불안정한 노동, 낮은 임금, 높은 월세와 물가, 천연덕스럽게 많은 0자를 붙이고 있는 사치품들 사이에서 자신을 건사하는 동시에 세계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 가늠조차 서지 않는다.
슬픈 것은 각자도생을 향한 경쟁으로 주조된 이 세계를 벗어날 길이 없어 기어이 일부가 되는 우리 모두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피해 조사를 위해 경매법원을 찾은 한 활동가는 젊은 사람들을 보고 말을 걸었다. 전세사기 피해자시면 설문조사 좀 부탁드려요. 모자를 눌러쓴 젊은이들은 경매 입찰자라 답했다.
전세사기 피해 건물이니 경매에 참여하지 말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대열을 지나 최저의 낙찰가를 통해 내 집 마련, 혹은 월세 받는 미래를 위해 달려온 또래의 젊은이들. 일상적으로 타인에게 작은 악의조차 쉽게 품을 리 없는 이들조차 경매 입찰자가 된다. 생존하기 위해.
그러니 '나는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는 김남주의 말은 너무나 호젓하고 당당해서 지금의 시대에는 도리어 어색하게 여겨진다.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왜 이제는 용감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가. 엄혹하던 그 시절의 정의와 오늘의 정의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그날은 반드시 온다
남은 것은 개털들뿐이다
나라 안에 이렇다 할 빽도 없고
나라 밖에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개털들만 남았다 감옥에
- '개털들' 중, 김남주
시원하게 대통령도 탄핵해 봤지만 세상은 별반 바뀌지 않았고, 법이라도 바꾸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손 빠른 공무원들이 시행령이니 시행규칙을 달달달 붙여대면 법조차 소용없어지기 일쑤였다. 복잡하게 꼬인 이해관계 사이에서는 현실을 바꿀만한 별다른 묘책이 없어 궁색해지기도 쉽다. 세상은 그렇게 감옥이다. 개털들의 감옥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함께 모여 목소리 낼 이유가,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한뎃잠 자는 홈리스라 할지라도 행색 따라 사람 솎아내는 경비원들에게 울화가 나고, 아무 때고 잡아 불심검문 일삼는 경찰에 모욕감을 느끼는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기후재난에 반지하에서, 논밭의 비닐하우스에서, 지하보도에서 참변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망가진 사회, 볼품없는 인생일지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 한 조각쯤은 누구에게나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다만 그 길은 (당분간은) 단호하고 선명하기보다 조심스럽고 견디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파죽지세로 몰아치자는 선언보다 실패를 두려워하면서도 한 발을 내디뎌보는 용기가 어쩌면 오늘의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