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임산부의 "위기"를 완화하는 정책 없이 상담만 한다면 결국 위기 임산부의 아기는 계속 보호출산제로 유입될 수밖에 없다.
픽사베이
미혼모 상담이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난 최근, 매체를 통해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위기 임산부'다. 반세기 전 '미혼모' 단어의 등장과 함께 '미혼모'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듯, '위기 임산부'에게는 잠정적 영아 유기범과 영아 살해범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있다. 이와 함께 위기 임산부와 아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활발하게 유포되더니 2023년 10월 갑자기 '경제적·심리적·신체적 사유로 출산과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위기 임산부'가 출산 후 그 아기를 유기해도 법적으로 문제시하지 않는 보호출산제가 통과되었다. 그리고 서둘러 전국에 위기 임산부 상담소 16개소가 설치되었다.
경제적/심리적/신체적 문제로 출산과 양육에 어려움이 있다면 경제적/심리적/신체적 지원을 강화하면 될 일인데 아기를 합법적으로 유기하게 하다니 모두를 어리둥절하게했다. 게다가 보호출산으로 태어났다고 유기된 아동이 유기되지 않은 것은 아닐터인데, 보호출산제가 아동 유기를 줄일 것이라는 말로 정부는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 단지 보호출산제 이전은 개인이, 이후는 국가가 유기에 개입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보호출산제로 합법적으로 유기된 아기가 갈 곳은 여전히 입양 또는 아동보호시설인 것은 마찬가지다.
보호출산 시행 한 달이 된 지난 8월 19일 전국 위기 임산부 상담소에 419건의 상담이 있었고, 그중 16명이 보호출산을 선택했다. 그로부터 불과 열흘 남짓 지난 8월 말 상담은 697건으로 늘었고, 보호출산도 21명으로 늘었다. 앞으로 상담수와 보호출산 건수는 계속 늘어날 것임은 쉽게 예견된다. 반 세 기 전 미혼모 상담을 하고, 미혼모를 보호 시설에 입소시키고, 미혼모가 출산한 아기 수십 만 명을 입양보냈다. 그 어두웠던 대한민국의 입양의 역사가 윤석열 정부의 보호출산제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상담이라는 '떡밥'과 보호라는 '그물'
보호출산제는 언뜻 보기에도 윤리적 문제와 법적 다툼의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다.
첫째, 위기 임산부는 일주일의 숙려기간이 지나고 입양이 확정되면 보호출산 결정을 영구히 번복할 수 없다. 안정적인 결혼을 통해 계획된 경우라도 임신은 여성을 위축시킨다. 서구의 경우 임신 중이거나 출산 직후 정서적으로 불안할 때 산모에게 입양동의 사인을 받는 것은 금지하는 쪽으로 변해왔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출산 후 6주가 지나기 전 서명한 입양 동의는 효력이 없다.
둘째, 자신의 출생 정보와 친부모에 대한 알권리는 인간의 기본 권리이다. 이 기본권을 빼앗긴 사람들은 평생 정체성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자기 정체성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생명보다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는 딱 그 만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보호출산으로 생명을 살렸다"는 그 생명은 정체성이 지워지고 뿌리가 잘렸으니 온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셋째, 친부나 위기 임산부 가족이 아기를 키우기를 원할 경우 이들의 양육권 보장에 대한 조항은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밖에도 윤리적/법적 문제는 많다. 게다가 위기 임산부를 위한 심리상담, 주거/의료/생계 지원 등 지원정책은 거의 제자리 걸음인데 '보호출산 신생아 긴급 보호지 지원'을 위해 5억 4천만 원의 예산을 새롭게 편성했다. 내년부터 보호출산 아동 1인당 100만 원의 돌봄 지원금이 지자체에 주어진다. 위기 임산부의 '위기'를 완화하는 정책 없이 상담만 한다면 결국 위기 임산부의 아기는 보호출산제로 계속 유입될 것이다.
보호출산은 위기 임산부의 마지막 선택지라며 정부는 보호출산에 대한 우려를 진화하려 한다. 그리고 상담을 통해 설득하여 위기 임산부가 보호출산 결정을 취소하고 양육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한다. 그러나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임신-출산-양육 과정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지원정책이 강화되지 않는다면, 위기 임산부는 양육을 설득 당하고 모성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빈곤에 빠질 위험을 감수하며 양육을 선택하거나, 보호출산을 선택하고 아기를 버린 엄마라는 죄책감을 감수하는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정부, 국회의원, 아동권리보장원, 사회복지 전문가는 위기 임산부와 그 아기 사이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임산부가 처한 위기 상황에 개입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호출산제는 위기 임산부와 그 아기에게 영원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제라도 위기 임신-출산-양육에 대한 지원 강화를 고민하고, 위기 임산부의 재생산권과 아동의 알권리를 어떻게 지켜 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보호출산제를 수정하고 예산은 기관이나 시설이 아닌 사람을 위해 배분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미혼모 아카이빙과 권익연구소장. 도서출판 안토니아스 대표. 인류학을 전공했으며 미혼모 관련 도서 출간, 기록물 수집, 권익옹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서: <미혼모의 탄생: 추방된 어머니들의 역사>, 역서: <아기 퍼가기 시대: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 등이 있습니다.
공유하기
[주장] '상담'이라는 떡밥과 '보호'라는 그물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