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광복단 기념관, 황정흠 지사 판결문
정만진, 국가보훈부
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 천신(天神)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天)을 열고(開)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 '시'를 열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모았다는 뜻이니, '개천'의 목적이 널리(弘) 사람(人間)들을 이롭게(益) 하려는 홍익인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서기전 2333년 음력 10월 3일,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 '조선'을 건국했다. (일연이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새 이름을 붙이면서 조선은 고조선으로 일반화되었다.) 즉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09년 대종교(大倧敎)가 민족의식 고양을 목적으로 개천절을 만들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했다. 1948년까지 음력 10월 3일에 행사를 열던 개천절이 1949년부터 양력으로 바뀌었다. 이때 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과 서기전 2333년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는 일이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냥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정했다.
경북 영주 풍기장날 만세시위 황정흠 지사
황정흠 지사는 1949년 10월 3일 세상을 떠났다. 1881년 경북 영주 안정면 생현리 400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8세였다. 1919년 4월 9일 영주 풍기 장날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13년 광복단이 풍기에서 결성되었다. 풍기 광복단은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등과 통합하여 광복회로 발전했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로 평가받는 광복회는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당연히 풍기에서도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안용호·최성원·남영진·황정흠 등은 풍기 장날인 4월 9일을 거사일로 선택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참가자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았다.
황정흠은 거사 당일 오후 3시 30분쯤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만세현장에서 안용호 등 3명의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황정흠은 군중 100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 앞으로 달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재차 시위를 펼쳤다. 대구지방법원은 4월 19일 그에게 소위 '보안법'을 적용해 태형 90도를 언도했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피체된 또 다른 황정흠 지사
황정흠(黃政欽) 지사가 시위를 펼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될 때, 또 다른 황정흠(黃鼎欽) 지사도 구속되었다. 제2의 황정흠 지사 또한 같은 영주 출신으로, 1889년 태어나 1956년 향년 67세에 타계했다.
제2의 황정흠 지사도 1919년 4월 9일 풍기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부 주도자들이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피체되자 제1의 황정흠 지사 등 100여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풍기 주재소 앞까지 달려가 시위를 계속했다. 대구지방법원은 그에게 소위 '보안법'을 적용해 징역 8월형을 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