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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결제가 안 되세요'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엉터리 존댓말, '감정 노동' 하는 세대에서 주로 사용... 사물 존칭 안 쓰면 "반말한다" 오해도

등록 2024.10.13 11:21수정 2024.10.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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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5800원 나오셨습니다."
"네?"
"1만5800원이세요."
"네?"

지난 주, 집에 내려가는 길에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 내 위치한, 제법 인터넷 상에서 입소문이 난 빵집에 들렀다. 아내가 부탁한 것도 있고, 아이도 주말에 간식으로 먹으면 좋겠다 싶어 몇 개 더 담았는데, 금세 1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집게를 그만 내려 놓고 계산대로 가져가 올려 놓았다. 직원분은 빵을 보고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충분히 모를 수 있다. 내가 왜 "네?" 하고 재차 반문했는지를. 아마,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했을 테다.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하더라도 대화하는 데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색한 문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이 나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1만5800원이 나오셨다니까. 사람 위에 돈이 군림하는 기분이랄까.

나는, 그때그때 하나하나 지적하고 알려주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그 직원분도 하루 종일 손님 상대하느라 힘들 텐데 굳이 나까지 나서서 별것 아닌데 스트레스 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손님을 너무 존중해 대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도 직업병인지 모르겠다. 버스에 올라 곰곰이 조금 전 일을 생각했다. 혹시 그가 사회에 나가 중요한 자리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까, 대중을 상대로 강의하거나 혹은 웃어른을 만났을 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데... 하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던 찰나, 지난해 아이와 어느 음식점에 갔을 때 봤던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사물존칭은 사람을 낮추고 사물을 높이는 어색한 말투다.
사물존칭은 사람을 낮추고 사물을 높이는 어색한 말투다.김관식

'현금 결제가 안 되세요.'

당시, 아이와 둘이 집에 남게 될 일이 있었고, 콧바람도 쐴겸 아이와 집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음식점으로 향했다. 맛있게 먹고 계산대에 선 아이가,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아빠, 이 말 어색한 것 같아."
"어디?"
"'현금 결제가 안 되세요'가 맞아?"
"그렇네. 사물 존칭이구나."

계산을 마치고 조용히 아이와 차에 올랐다. 여기서 자칫 일장연설이 들어가면 의도와 달리 아빠 역시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간단히 말했다.


"이건 '사물 존칭'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낮추고 사물을 높이는 어색한 표현이야."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해?"
"그냥, '거스름 돈이 없습니다'로 써도 좋고, 아니면 그 문장을 아예 빼도 좋고."
"그렇네."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점(상황)과 대안(해결방법)만 제시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단문으로 끊어서 써보면 어떨까...

'거스름 돈이 없습니다. 카드결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럼 이런 엉터리 높임말을 왜, 누가, 무엇 때문에 쓰게 됐는지 말이다. 이유 없는 과정도 없고, 원인 없는 결과도 없으니까. 그래서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다가 조금은 심각하게 느낄 수 있는 통계 하나를 찾았다.

사물 존칭의 슬픈 이면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이 알바생 217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2020. 10. 8)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이 알바생 217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2020. 10. 8)알바몬

2020년 10월 8일,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이 알바생 217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알바생 5명 중 4명(79.8%) '엉터리 높임말(사물존칭)'을 사용해본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알고도 썼다는 것이다. 또 설문에 참여한 알바생 중 68.4%가 '이런 높임말이야 말로 감정노동에 해당한다고 여겼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더 나아가 '잘못된 표현인 줄은 알지만 그렇게 쓰지 않으면 어색하거나 무례하게 느껴질까봐'라는 응답이 44.6%로 1위였다.

내가 더 놀랐던 것은, "커피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이 잘못된 말인 줄 알지만, "커피 나왔습니다"라는 말을 쓰면 간혹 "반말한다"고 오해하고 호통치는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감정노동의 폐해인 셈이다.

이런 어색한 존대, 사물존칭을 쓰는 이유에 '그렇게 쓰지 않으면 불친절하다고 여기거나 항의하는 손님들 때문'이라는 응답이 35.9%나 나오고, '극존칭에 익숙한 손님들을 위해 알아서 사용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26.4%가 나왔으니, 이쯤 되면 알바생들에게만 "엉터리 존댓말 쓰지 말라"고 지적하거나 훈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들어 카페에 가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주문되셨습니다"다. 이 말은 이제 하도 들어서 틀린 줄도 모를 지경이다. 알바몬이 이때 공개한 자료를 보면, ▲"이렇게 하시면 되세요"(51.4%) ▲"그 메뉴는 안되세요"(50.4%)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주문 되셨어요"도 30.3%로 조사됐다.

지인 중에 CS 교육을 전담하는 분이 있다. 그에게도 실제 '사물 존칭'을 쓸 때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걸 왜 묻는데?" 하며 이상하다는 듯 되묻길래 "요즘 (엉터리 높임말을) 알면서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라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알지. 나도 알면서 쓰긴 해. 그런데 이상한 게, 고객들도 알면서 아무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는 거야. 오히려 좋아해. 자신을 향한 존댓말을 더 높여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고객 불만이 없게끔 하려고 '이렇게라도 애쓰고 있다'는 느낌으로 대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잖아."

결국 고객 대응, 매출, 존중과 직결된 갑과 을 사이에 흐르는 삐뚤어진 의식이 이러한 외계어 양산에 기름을 붓고 있던 건 아닐까. 제대로 된 언어습관이야 말로 올바른 사회적 소통을 이뤄가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라 생각한다. 건강한 소통을 위해서라도 올바른 언어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정한 고객을 위한 마음은 사물이 아닌, 고객을 높일 때 생겨내는 것이다.

또 하나, 서비스업에서 빈번하게 일고 있는 것이니 만큼, 고객 역시 무조건적인 과잉 친절을 강요하거나 감정을 쏟아내서는 안 된다. 나의 품격은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사물 존칭 하나에 이러한 어두운 우리 사회의 이면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분명 함께 바뀌나가야 하고, 그 첫 걸음이 이 순간부터이길 바랐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글쓴이의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사물존칭 #엉터리존댓 #수평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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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교육원 전임교수. 사소한 것일 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화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아파하는 곳을 찾아갑니다. seoulp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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