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한글 자음·모음 활자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한강도 수상 발표 뒤 노벨위원회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 작품과 함께 자랐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무수한 선배 작가들의 영향 속에서 생각과 재능을 키워왔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글이라는 표현 수단이 없었다면 노벨위원회가 극찬한 그의 '시적인 산문'도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번역이 뛰어나다고 한들 한글로 된 아름답고 섬세한 원래의 표현을 뛰어넘을 순 없었을 테니까요.
저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문학의 영광이자 '한글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마침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공표한 날을 기념하는 한글날 바로 다음 날에 날라 온 게 '신의 조화'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글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 전령사가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한글을 대하는 자세는 어떻습니까? 한글이 태어난 지 578년이 됐지만 아직도 당당하게 적자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상점가는 미국의 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영어 간판들로 뒤덮여 있고, 대통령을 비롯해 힘깨나 쓰고 배웠다는 사람들은 영어 단어가 하나라도 들어 있지 않으면 문장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한글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국민의 언어생활에 가장 직접적이고 큰 영향을 끼치는 미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교육방송> 등 일부 방송사가 몇 년 전부터 한글날 하루만 생색내듯 한글 사명을 화면에 표시하고 있지만, 한글날이 아닌 다른 날은 영어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허가장을 받기 위한 꼼수처럼 보여 마음이 불편합니다. 민족신문을 자임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더합니다. 종합일간지 중에서 두 신문만 아직도 한자 제호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한글 씨앗'을 뿌리고 일궈 노벨문학상이라는 꽃을 피워낸 한강의 성취가 한글을 더욱 갈고닦아 풍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문학을 일구고 가꿔온 박경리, 박완서, 이청준, 이문구, 조세희, 황석영 같은 훌륭한 작가들 못지않게, 한글을 만들고 지켜온 분들에 경의를 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주시경, 서재필, 호머 헐버트, 최현배, 한창기, 백기완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악전고투하며 한글을 다듬어온 선인들을 전 사회적으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바람이 불길 기대합니다. 그것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사회에 던져 준 여러 숙제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6
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공유하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사회에 던진 숙제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