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택배일기> - 택배 상자 들고 가리봉동을 누빕니다
산지니
<목사님의 택배일기> 제목을 보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30년 동안 가르쳐온 목사가 가리봉동 일대에서 택배 노동하는 이야기'라는 주제에서 문득 낯설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된 냉전의 갈등은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교회들도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면서 맞이했던 것은 폐허가 된 국토와 뼈아프게 서러웠던 가난이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의 경제 원조와 군사독재 정권의 경제 개발 계획에 맞물려 교회들은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해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죄악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이 잘 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며 건강해질 수 있다'는 등 자본‧성장 친화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당시 정부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눈을 돌리지 않도록 정부에 협조적이던 교회들에 자본‧부동산 등을 표면적으로 또는 물밑에서 지원했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들은 당시 정권과 국가조찬기도회 등 유착관계를 맺다 보니 정의‧공의와 같은 담론이 사라지고 자본과 권력에 한편이 되었다.
'개구리들의 우물'이 돼버린 한국교회
1987년 6‧29 선언 이후 들어선 민주 정부와 함께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한 기술 선진화는 세계에서도 주목받았고, 지역 사회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지방자치와 시민사회단체들이 활성화되는 등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이면에 부정적인 변화 역시도 존재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민영을 넘어 공공기관에까지 도입됐으며,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또한 길어진 경제 침체 현상과 개인주의가 맞물리면서 날이 갈수록 혼인율과 출생률이 곤두박질쳤다.
한국 개신교회도 사회적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매년 거듭된 인구 감소는 신자의 감소와 예비 목회자인 신학생의 감소로 이어졌고, 목회자들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심해졌다. 특히 지방의 대‧중형 교회를 제외한 농‧어촌 및 소형 교회 목회자들은 도저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오늘날 고물가‧고금리 상황 속에서 간신히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 중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목회 업무를 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사회적 노동을 하며 소득을 마련하는 소위 '이중직' 목회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중직 목회자 발생 초기에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현실을 역행하는 행보를 보였다.
매년 개최되는 교단 총회에서 새롭게 총회장 자리에 오른 목회자 중 과반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 중‧대형급 교회 출신이고, 당장 이중직 목회 인정과 생계 지원이 시급하다고 건의를 올려도 정작 'n년 동안 연구'이거나 '허용 거부'라는 답답한 결정이 반복돼 왔다.
이런 행보 속에 목회자들은 '각자도생'으로 내몰렸다. 갈수록 심해지는 구직난과 경제난 때문에 목회를 포기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사태가 심해지자 주요 교단들도 부랴부랴 이중직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교단 제도 마련과 지원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회의적이거나 이미 늦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진흙' 같은 노동에서 깨달음 얻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