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 용호각에서 촬영한 두만강 하류 모습. 북한 나진에서 러시아 하산으로 가는 철교 모습으로 두만강을 따라 조금만 더내려 가면 동해바다인데 중국측 안내간판에는 일본해라고 적혀 있었다.
오문수
통일이 됐더라면 두만강도 우리 땅이었을 텐데, 새삼 가슴이 아프다. 망원경으로 북한 나진 마을을 살펴보니 커다란 간판에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현수막과 글씨가 보인다.
밤이면 화려한 불빛을 비추며 잘사는 중국쪽 마을, 그럼에도 그걸 부러워하지 말자는 북한 측 안간힘처럼 보였다.
국경선은 인간이 설정한 인위적 분단선이다. 그런데 우리 땅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선을 그었다. 일행과 함께 중국 동북 지방 끝에 있는 '밀산'까지 다녀오는 동안 한강만큼 넓은 목단강도 보았다. 만약 옛 고구려 땅이었을지도 모를 흑룡강까지 우리 땅이었다면 어땠을까?
전망대 꼭대기 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보면 중국에서 전시해 놓은 역사 자료와 두만강에서 채취한 수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하던 조선인들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훈춘 관광을 마치고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는 경신평야가 있다. 가이드가 경신대학살에 대해 설명해줬다.
청산리전투(1920.10.21.~1920.10.26)에서 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확인된 숫자이고, 미확인된 숫자를 포함하면 1만명은 될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수몰되어 들어갈 수 없는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적지
중국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이 방문한 곳은 봉오동 전적지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영향받은 중국 동포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변 각지에 흩어져 살던 3만여 동포들이 12일 후인 3월 13일 용정시에 모여 비무장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지만, 일본 경찰의 발포로 인해 그 즉시 1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동포들은 무장 항일 투쟁으로 방향 전환했다.
무장 항일 투쟁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홍범도는 일본군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홍범도를 잡으러 봉오동으로 들어왔고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포위망에 걸려 157명이 사살되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