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어딜 가나 꽂혀있는 '즐길 거리 홍보물'. 들여다 보면, 제주도다운 것들은 거의 없다.
서부원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시설의 수는 일일이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일례로, 카트를 타는 곳도 여러 곳이고, 테마파크라는 이름을 붙인 시설은 발에 치일 만큼 많다. 트렌드에 맞춰 새롭게 지어지는 곳도 있고, 기존에 운영되던 시설이 흉물스럽게 방치된 곳도 적지 않다.
압권은 골프장이다. 현재 제주도에는 서른 개 가까운 골프장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사통팔달 뻗은 도로의 어디서든 이름 뒤에 'CC'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한라산 정상부를 제외한 중산간 지역은 죄다 골프장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때 제주도는 청정한 자연환경과 이국적 정취로 상징되는 곳이었다.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됐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몸살을 앓은 지 이미 오래고, 남국의 정취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여 고유의 전통문화와 함께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몇 해 전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경험한 한 지인은 지금의 제주도를 두고 '닳아지면 그대로 버려지는 충전 불가능한 배터리 신세'라고 표현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의 난개발로 제주도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제주도의 전출인구가 전입인구보다 많다는 소식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취지도, 의미도, 효과도 모두 사라졌다고 단언했다. 차라리 제주도 본섬에 딸린 비양도나 우도, 가파도 등에서 한 달을 지내보는 게 나을 거라고 조언했다. 관광객들 등쌀에 머지않아 제주도의 전철을 밟게 될 테니 서둘러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주 신공항 건설 예정지 근처를 지날 즈음 기사와 다시 한번 언쟁이 일었다. 신공항이 열리면 그러잖아도 '그로기 상태'인 제주도에 마지막 카운터 펀치가 될 게 분명하다는 내 말이 화근이었다. 그는 찬반 의견이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지만, 신공항 건설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딱히 근거는 없었다. 그저 "당장 우리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과 "정부가 밀어붙이는 국책 사업은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게 전부였다. 그가 말한 '현실론'은 이른바 '과잉 관광'의 폐해에 시달리는 이웃의 고통에조차 눈 감은, 참으로 비루한 것이었다. 그에게 자연환경은 미래세대로부터 잠시 빌려온 것이란 말은 차마 건네지 못했다.
내일 그는 이른 아침 아이들을 한라산 성판악 휴게소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날씨가 허락된다면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다녀올 예정이다. 한라산을 등반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수다. 정부는 한라산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 등산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한라산 등산객 수는 엄격히 제한하면서,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제주도를 망가뜨리는 외지인 관광객을 통제하지 않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마 한라산 주변만 보호하고 해안가와 중산간 지역은 방치하겠다는 걸까. 한라산이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한라산인데 말이다.
점심 식사를 위해 성읍 민속 마을에 들렀다. 정작 민속 마을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냥 점심만 먹고 나왔다. 수학여행단을 수용할 수 있는 단체 식당이 그곳 근처에 있어서다. 버스가 지나가는 마을 길 어귀에서 차창 밖으로 본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당산나무 아래의 평상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대형 버스들의 행렬을 멍하니 지켜보는 촌로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과 슬픈 표정에서 머지않은 제주도의 잿빛 미래를 보았다. 저 촌로들이 세상을 떠날 즈음 제주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