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생가 모습
오문수
일제강점기 시절 명동에서는 만주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했던 독립투사를 비롯한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등의 명사들이 태어났다. 명사들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명사들의 기백과 뜻을 품어줄 토양이 있어야 한다. 토양은 그들을 품어준 뿌리와 교육이 되겠다.
'북간도'란 지명은 우리의 기구한 역사를 의미한다. 강을 건너면 '월강죄'란 죄목으로 사형까지 불사하는 가혹한 시절, 사람들은 두만강 사이에 있는 ' 사이섬(間島)'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배를 내어 강 건너 비어 있는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강만 건너가면 어찌나 비옥한 지 농사가 잘 되었다. 처음엔 그냥 두만강 이북 땅을 '간도'라고 불렀지만 나중엔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 두만강 이북을 '북간도'라고 불렀다.
1899년 2월 18일, 두만강변 회령과 종성에 거주하던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의 네 학자들 가문에 속한 22개 집안 식솔 141명의 이민단이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이 세운 마을이 명동촌이다.
김약연은 명동학교의 초대 교장이 됐고,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선친이다. 윤동주 아버지 윤석영은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사이다.
명동으로 이주한 이들은 각자 낸 돈의 비율에 따라 땅을 분배했다. 그런데 이들이 했던 일 중 가장 의미 있던 일은 '학전(學田)'이란 명목으로 걷은 교육기금이다. 이 기금은 명동학교의 밑거름이 됐다.
이들이 북간도 이민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아래 세 가지였다.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좀 잘살아보자
▲집단으로 들어가 삶으로써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자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자
신학문에 눈뜬 명동 사람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힘을 실감한 명동 사람들은 유학을 가르치던 3개의 서재를 하나로 합친 후 '명동서숙'이란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전환했다.
이후 1908년 4월 27일 현대적 감각을 지닌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1909년에는 교장 김약연, 교감 정재면 체제가 되면서 명동에는 기독교 문화가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