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평론가의 <제주영화사>
한상언영화연구소
원로평론가 김종원 선생이 최근 발간한 <제주영화사>에는 제주영화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과정 및 여러 뒷이야기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제주 출신 최초의 배우와 제작자, 제주에서 처음 촬영된 영화를 비롯해 제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등등 한국영화에서 제주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담아 놨다.
<제주영화사>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전후 제주영화사의 중심은 극장이었다. 대도시 중심으로 영화사들이 있었으나, 제주는 소비하는 곳이었기에 극장이 제주영화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활동사진 관람 욕구가 커지면서 흥행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창심관에 이어 해방 직전인 1940년대 초반에는 조일구락부극장이 개관했고, 제주극장과 현대극장으로 이름이 바뀌며 1987년까지 이어졌다.
제주 출신 최초의 배우는 1920년대에 후반에 등장한 강석우 강석연 남매였는데, 윤백남 감독 <정의는 이긴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강석연 배우는 한국농구의 원로 방열 선생의 어머니다.
제주를 담은 최초의 영화는 1946년 7월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제주의 풍토기>으로 조선영화사 뉴스반이 한라산 학술조사대와 동행해 촬영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전쟁 전후 제주와 관련된 영화는 4.3 항쟁이 주된 소재가 된다.
1948년 미군 통신부대 촬영팀이 14분 분량 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를 만들었고, 1950년에는 4.3을 기록한 <한라산전투기>가 부산 부민관에서 상영됐다. 제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는 1953년 제주경찰국에 제작한 <한라산에 봄 오다>였다. 이 역시도 산으로 피신한 야산대의 귀순을 독려하는 선무공작용 기록영화였다.
제주영화사의 시작은 독립영화
한국영화에서 제주영화가 부각 된 것은 2013년 오멸 감독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이 계기였다. 4.3 항쟁을 미학적 화면으로 그린 독립영화 <지슬>은 2012년 부산영화제를 통해 주목받은 후 이듬해 3월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앞서 1992년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 굴의 슬픈 노래>로 싹트기 시작해 2003년 김경율 감독의 <끝나지 않은 세월>로 4.3.항쟁을 그리려 했던 제주 독립영화가 이뤄낸 결실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4.3과 제주의 역사성이 영화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다.
보는 영화에서 만드는 영화로 제주영화의 지형을 변화시킨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4.3 항쟁 진상규명 요구가 높아졌다. 의식있는 영화인들이 이를 발판 삼아 제주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된 것이다.
저자 역시 책에서 '제주영화사'의 새로운 시작을 독립영화로 평가하고 있다.
'제주 영화역사에서 독립영화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는 참으로 크다. 영화제작의 불모지에서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는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제주의 독립영화인들은 일찍이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과 시장, 인적 등 여러 여건이 따르지 않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몸을 던져 시나리오를 쓰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촬영 현장을 뛰어다닌 결과가 이렇게 알찬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주 현지인에 의한 영화의 제작은 그것이 비록 독립영화의 형식을 빌린 것이라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제주영화사는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그 이전의 제주영화 발자취는 외지로 나간 이 지역 출신 영화인들의 활동을 기록하는 수준에 머문 아쉬움과 한계가 있었다. 제주 독립영화인들의 왕성한 활동에 자극받아 유능한 신인들이 나올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앞서 독립영화에 눈 뜬 김경률, 오멸 감독 등이 애써 심어놓은 묘종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제주영화사>에는 '그 이전의 제주영화 발자취'들이 주로 담겨 있다.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접수해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던 김묵 감독에서부터 한국전쟁 때 제주로도 피란해 정착한 임원식 감독과 두 아들 임종호, 임종재 감독, 제주에 박물관을 만든 신영균 배우, 서귀포 안던면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장선우 감독,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한태일 배우, 70년대 하이틴 영화의 기수였던 문여송 감독, 국민 엄마로 불리는 고두심 배우, 제주 한림에서 태어난 김희애 배우 등등 수많은 제주 영화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영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나섰던 양윤모 평론가, 현재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양윤호 감독, 한국영화감독협회 김종진 감독, 과속스캔들 양형철 감독, 임흥순 감독까지 다양한 제주 영화인의 출연작을 망라했다. 제주영화사이기도 하지만 제주영화인 인명사전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 책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