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정신은 평등과 연대의 정신이다. 지난 7월 24일 열린 한국옵티칼 고공농성 200일, 고용승계촉구! 먹튀방지법 제정 민주노총 결의대회.
백승호
전태일정신은 노동자 몸과 건강의 사상
2024년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서 다시 거꾸로 세워야 할 가치관은 무엇일까. 전태일 정신은 노동자 몸과 건강에 근거한 사상이기도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조직한 삼동회와 함께 1970년 평화시장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한다. 라디오 방송에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려 했지만, '좀 더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오라'며 거절당한 이후 발로 뛰어 126명에게 설문을 받았다.
그 결과에 따르면, 95%인 120명이 하루 14~16시간 노동하고, 96명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렸으며, 102명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전원이 눈병 증상을 갖고 있었다. '못 배운 사람은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거'라고,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노동자는 으레 그렇게 사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실태조사 결과는 되묻는다. 그게 정말 맞냐고.
노동자들의 이런 처참한 환경이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보지도 듣지도 않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나라'가 먼저 잘살게 되면 다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실태조사 결과는 10월 7일 <경향신문>에 크게 실렸고,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을 면담하기까지 했지만,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달라지는 건 없었다. 노동청 앞에서 시위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태일이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한 배경이다.
우리는 듣고, 보고 응답하고 있는가
50년이 지난 2024년 한국 사회는 이런 목소리를 보고 듣고 응답하고 있는가. 2024년 9월 민주노총은 선박건조, 수리업에 대한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2024년 들어 공익감사 청구 시기까지 조선업 사업장에서 끼임, 폭발, 추락으로 1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조선소에서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산업재해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망 사고가 가장 많은 업종 중 하나다.
이미 6년 전인 2018년,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가 꾸려져 방대한 조사를 통해 사고조사보고서를 낸 바 있다. 그 보고서는 조선업에서 안전을 위배하는 무리한 공정 진행이 자주 발생하고, 이를 위해 재하도급이 빈번하게 확대되면서 하청 노동자가 과도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안전에 대한 책임이 불분명해지는 것이 조선업 중대재해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중대재해 방지와 안전 확보를 위해 다단계재하도급의 원칙적 금지와 필요한 경우에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도록 하고, 무리한 공정 진행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나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노동부와 조선사들이 '위험표지판 부착 캠페인', '10대 안전수칙 캠페인'을 하지만, 조사위원회가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 제시한 다단계 재하도급 금지와 제한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안전과 비용, 생명과 생산 효율을 견주어보고 비용과 생산 효율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4년 전태일 정신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이 낡은 비교와 기준을 바꾸는 것일 테다.
일터의 화재 참사, 무엇을 남길까
1911년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공장 화재 사고가 있었다. 뉴욕에 있는 10층짜리 건물의 8~10층을 사용하던 공장이었다. 노동자들 대부분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된 가난한 여성 이주노동자들이었고, 사업주는 노동자들이 옷가지를 훔쳐 간다는 이유로 출입문을 잠가두었다. 화재가 일어나자 공장주는 열쇠를 들고 먼저 탈출해 버렸다. 화재경보벨이 울리지 않아 화재 발생을 뒤늦게 알았던 노동자들은 비상계단으로 대피하다 부실한 계단이 무너져내리면서 추락사하기도 했다. 이 참사에서 14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80년 뒤인 1991년 노스캐롤라이나주 햄릿에 있는 임페리얼푸드 닭고기 공장에서도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노동 관련 규제를 회피하고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사용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의 흑인 거주 지역에 세워진 공장 기계의 유압액이 누출되어 튀김 기계에 불이 붙었을 때, 공장은 환기가 거의 되지 않는 상태였고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화재비상구는 잠겨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닭을 훔쳐가는 일이 잦다는 이유였다. 이 화재로 사망한 25명의 노동자는 대부분 흑인 여성이었다.
꼭 닮은 이 두 사고 중 그나마 트라이앵글 화재는 전국적으로 변화를 끌어내기라도 했다. 노동자배상법이 만들어지고 화재 비상구와 화재 경고 벨,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 문을 잠그지 못하게 하는 규제가 생겼다. 그러나 햄릿 화재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3)
아리셀 참사 이후 우리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고용에 따라오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제조업에 불법인 파견노동자를 사용한 데 대한 처벌을 요구할 뿐 아니라, 법적 고용 관계에 근거하지 않고도 노동을 통해 이윤을 챙기는 '자본'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리셀은 사고가 발생한 6월 한 달 동안 60명의 인력을 일시적으로 투입하여 100명이 넘는 노동자로 생산 시설을 가동했으면서도, 상시고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5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여러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작은 사업장 안전에 법적 사각지대를 허용하는 법체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
가스 검지 및 경보 장치가 없었고 화재 위험 물질에 대한 교육도 없었던 점에 대해, 화재 관련 근로감독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을 넘어서, 안전한 노동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일터의 안전과 관련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할 때, 고용이나 임금을 걱정하지 않고 노동자가 작업을 중단하고 조치를 요구할 수 있도록 노동자의 힘을 키워나갈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 정신의 2024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