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정부종합청사 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의료급여 정률제 개악 철회 촉구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의 '다이인(die in)'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빈곤사회연대
이 '의료급여'는 그 '의료급여'가 아닙니다
'의료급여'를 아시나요? 말 그대로 풀이하면 의료라는 현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아마 "건강보험 급여 보장성이 낮다", "실손보험 때문에 비급여 진료가 남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때 '(요양)급여'란 건강보험 가입자와 피부양자에게 검사, 치료, 예방 등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급여 진료는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서비스를 뜻하는 것이고요. 또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제공하는 '장기요양급여'라는 말도 종종 접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와 전혀 다른 의미의 고유명사로 '의료급여'가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국가가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공적 의료보장제도로서의 의료급여인데요. 대상자 수가 전체 인구의 약 3% 남짓이다보니 이런 제도가 존재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심지어 제 주위에 보건의료정책을 전공한 사람들조차 낯설어 하니까요. 의료급여 수급자와 의료기관 종사자 정도를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현실입니다.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는 현대 복지국가의 기본 책무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흔히 '전 국민 건강보험'이란 말을 쓰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실과 다릅니다. 한국의 공적 의료보장체계는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로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의료급여제도는 건강보험료와 치료비를 부담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저소득층의 의료이용을 보장하기 위한 공공부조의 일환으로서, 공적 의료보장체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의료급여가 낯설고 헷갈리는 이유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빈곤층 의료보장제도'라는 사실이 전혀 연상되지 않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 말입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이 좋은 명칭일텐데, 그런 점에서 의료급여는 불친절한 용어입니다.
실은 의료급여로 명칭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의료보호'로 불렸는데요, 지난 2001년에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려는 취지로 법명이 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시민사회가 제안했던 '기초건강보장법' 대신에 정부안인 의료급여법으로 개정법명으로 결정되었죠.
정부는 왜 이런 '무색무취'의 단어를 택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여하튼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기 어렵고 따라서 잘 와 닿지 않는 이름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부의 의료급여 제도개편을 비판하는 연재 글을 시작하는 서두에 의료급여를 아시냐고 물은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용어도 헷갈리고 무엇보다 제도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이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기 입장을 정하고, 힘을 보탤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서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최후의 의료안전망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급여 정률제 도입은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각자도생 사회에서는 실직, 파산, 사고, 발병 등 여러 예기치 못한 불운이 겹치면 누구라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튼튼하고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이를 통해 경제적 곤경에 처한 이들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데 다들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의료급여 역시 헌법에 명시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34조)를 보장하는 것을 본연의 역할로 하는 사회안전망 중 하나입니다. 의료급여법 1조에는 "생활유지능력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국민에게 발생하는 의료문제에 대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국민보건의 향상과 사회복지의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의료급여제도의 기본 정신에는 '곤궁하다고 해서 더 아프거나 더 일찍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회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또한 법률 조문에 표현되지 않았지만,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정책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의료급여제도는 빈곤과 불건강(질병)의 '악순환'을 끊는 것을 근본 목표로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과 불건강은 의료비 지출을 증가시키고 경제 활동을 제약해 소득 감소·상실을 초래함으로써 빈곤 상태를 유발·악화시킵니다. 또 반대로 빈곤은 의료이용을 제한하고 주거, 교육, 영양 등 건강을 결정하는 여러 요인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기에 악순환인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가난한 이들의 건강을 보호할 국가 책임이 제도적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의료급여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의료보장이 곧 건강보장인 건 아니지만,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유력한 수단이 의료라는 점에서 의료급여는 빈곤층 건강보장을 위한 정책 수단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아울러 빈곤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질병으로 인한 빈곤화를 예방하면서 '모든 이들의 건강(health for all)'을 추구하는 최후의 '의료안전망'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지닙니다.
사회 공동체의 존재 가치를 일깨우는 제도
이와 더불어 사회보장의 측면에서 볼 때 의료급여는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치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모두 빈곤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무상의료의 대표 사례로 알려져 있는 영국 국가공영의료체계(NHS)의 출범을 이끌었던 베번은 비용 부담 없이 의료 이용을 할 수 있는 것을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가난해져도 병원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는 안도감과 자유감이 사회 공동체의 존재 가치를 일깨우며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의료급여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소중한 제도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이원화된 체계가 최선인 것은 아닙니다. 앞선 말한 영국과 같이 단일한 의료보장체계였다면 애초에 이런 논의가 불필요했을테니까요.
한국처럼 사회보험 제도로 운영되는 나라에서도 하나의 공적 체계 내에서 보험료나 의료비 등을 지원·감면해주는 방식으로 가난한 이들의 의료이용을 보장해주는 게 일반적입니다. 미국이야 민간 의료보험 중심 체계이다보니 메디케이드(Medicaid)라는 별도의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를 둘 수밖에 없지만요.
제도적 분리는 비수급자들이 의료급여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뿐 아니라 빈곤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구별된 제도는 필시 사회적 낙인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요. "국민 세금을 축내는" 이들이라는 모멸적 인식과 시선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의료급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언젠가 이 제도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보다 "나는 절대로 (낙인의 대상이 되는) 수급자가 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회피적 심리 기제가 더 크게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