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적응하라, 아니면...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

[서평] 사는 일 고될 때 집어들게 되는 고전 <프란츠 카프카 단편선>

등록 2024.11.13 16:26수정 2024.11.1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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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단편선을 다시 읽었다. 단식을 하는 '단식광대' 직업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런 업이 예전에 정말 존재했나 궁금해 검색해보았더니 실제로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선 단식 공연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1880년대에 정점을 찍은 이후 서서히 사라졌다고 하니 카프카의 단편 소설 <단식광대>는 작가의 소설적 상상이 아닌, 한 때 성행하다 퇴출되어 버린 하나의 생존방식을 이야기한 셈이다.


작가 카프카는 1922년에 이 글을 발표하고 두 해 뒤 결핵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아마도 투병하며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심신을 그대로 단식 광대에 투사하지 않았나 싶다.

같은 '우리'인데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이야기

<단식 광대>의 줄거리는 이렇다. 그는 하루 종일 우리 안에서 단식하는 자다. 감시인이 밤낮으로 지키며 그가 몰래 음식을 먹는지 확인하지만 누가 보든 안보든 개의치않고 정직하게 단식한다. 단식하는 동안 구경꾼들이 다가와 뼈만 앙상한 그의 몸을 만져보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한다. 최장 40일 간의 단식을 마치고 나면 그는 대대적인 축하인사를 받는다.

그는 여러 해를 그렇게 살았다.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인기도 얻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는 조짐이 조금씩 나타났다. 사람들이 더 이상 단식쇼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야생맹수들 같은 새로운 볼거리에 환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변화를 눈치챘지만 단식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어떡한담. 다른 직업으로 갈아타려니 너무 늙어버렸다. 무엇보다 단식에 깊이 빠져 발을 빼기가 어렵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계속 단식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리 안 썩은 짚더미 속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그가 며칠동안이나 단식하다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립되어 우리 안에서 굶어죽은 단식광대와 달리, 카프카의 또 다른 단편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는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가 탈출을 시도해 살아남는 이야기다. '우리'라는 공간이 공통으로 등장하는 두 이야기가 묘하게 대조되었다. 우리 안과 밖의 구도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비유되었고.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줄거리는 이렇다. 원숭이 빨간 페터는 지난 5년간의 생활을 학술원 나리들께 보고한다. 내재된 원숭이 본성을 누르고 기필코 이루어 낸 인간화에 대하여. 빨간 페터는 말한다. 자신의 성공 요인은 뭐니뭐니해도 자기 안의 원숭이 본성을 포기한 것이었노라고.


5년 전, 황금해안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던 야생 원숭이가 유럽의 동물원 사냥단에 포획되었다. 사냥단이 쏜 총탄 한 발이 뺨을 살짝 스치는 바람에 빨간 흉터가 생긴 이 원숭이를 사람들은 '빨간 페터'라 불렀다.

빨간 페터가 눈을 떠보니 배 안의 우리 속이었다. 이 배는 맹수들을 가득 싣고 망망대해를 지나는 중이다. 페터는 우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시작한다. 탈출하더라도 다른 우리로 들어가 독사에 물리면 큰일이다. 재수 없으면 더 무시무시한 맹수 우리에 갇힐 수도 있다. 만약 발을 헛디뎌 망망대해에 빠지기라도 하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혹시 저 인간들과 같은 부류가 된다면? 빨간 페터는 인간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인간들처럼 바닥에 침을 뱉고, 악수하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인간의 말을 따라해본다.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드디어 페터는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정말로 우리 문이 열렸다.

인간들이 사는 대륙에서 빨간 페터는 매니저와 순회공연을 한다. 어딜 가나 대성황이다. 공연을 끝내고 귀가하면 암컷 침팬지가 페터를 맞는다. 둘은 원숭이 방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암컷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감지한 페터는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한다. 인간처럼 살아온 지난 5년, 페터는 크게 후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마음도 없다.

단식광대와 빨간 페터의 이야기에는 생존의 고달픔이 절절이 묻어난다.

무관심 속에 죽어가던 단식광대를 발견한 이는 마침 그곳을 순찰하던 서커스단 감독이었다. 광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마치 고립무원의 세계에서 외로움에 지친 자가 '나 여기 있소!'라고 온 힘을 다해 외치는 것 같다. 광대는 이런 말을 하고 죽는다.

"저는 달리 어쩔 수 없어서 단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음식을 찾아냈다면 괜한 소동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
-<단식 광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창비세계문학

반면, 빨간 페터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터득해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작품 속 페터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저는 출구가 없었지만 출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출구가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요."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프란츠 카프카 지음, 창비세계문학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그의 강의모음집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2012)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대 생명관리권력의 통치기술은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두기'로 요약할 수 있다. 시장에 적응할 수 있는 자,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를 두고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경제인)는 사회 안에서 살게 하고, 적응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사회 바깥에서 죽게 내버려둔다. 신자유주의는 살아있는 생명인 인간을 특정 형태로 생산해내는 일종의 통치술이다."

나는 푸코의 이 말이 가슴서늘하게 다가오는 걸 인정한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신자유주의라는 체제에 적응해 살던지 아니면 거절하고 죽을 것인지 실존을 고민케 하는 세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식 광대를 신자유주의 사회에 적응 못한 자로 규정한 순간, 노동력을 상실하고 생계가 막힌 사람들이 사회 바깥으로 내몰리는 뉴스 장면들이 연거푸 떠올랐다. 사회나 국가 공동체가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걱정하고 도와줄 수는 없을까. 우리는 그런 세상을 꿈꿀 수 없는 걸까.

물론 '빨간 페터'는 적응력을 갖춰 살아남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해보이진 않는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유례없이 인간화된 원숭이로서 유명세를 얻고 돈을 많이 벌면 무슨 소용인가. 힘들고 외로울 때 자기 속내를 들어줄 친구 하나 없는데.

황금 해안에서 야생 원숭이 친구들과 무리짓고 살 때가 좋았을 것이다. 같이 먹고 같이 굶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슬퍼하던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울까.

신자유주의는 인간 사회에 적용할 만한 최선의 체제는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생존싸움에 실패해 죽은자나, 경쟁에 승리해 살아남은 자나 모두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를 설계하는 부류들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지 고민 좀 많이 했으면 좋겠다.

내가 카프카 소설을 뒤적일 때는 주로 사는 일을 고심할 때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카프카 책을 읽고나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좀 다르다. 살다가 답답한 심정이 들 때면 카프카 책을 천천히 읽는다.

그의 작품을 반복해 읽다보면, 왜인지 길을 잃고 헤매던 버릇은 줄어들고 어느새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곤 한다. 작가가 겪었을 심신의 고통을 잠시 상상해보는 여유도 생기고 말이다.

 단식 광대 스케치
단식 광대 스케치 홍윤정
#프란츠카프카 #단식광대 #학술원에보내는보고서 #신자유주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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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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