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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고창에서 30km 떨어진, 서해바다 끝자락에 있는 마당 밑에서부터 바다가 시작되는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선장이셨는데, 배를 타러 나가지 않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 농사도 지으셨다. 나는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부모님이 밤낮없이 일하셔서 잘 살지는 못해도 모자람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면, 언니들이 동생들을 돌보거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셨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서당도 열 만큼 박식하신 분이었는데, 어린 우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다. 어릴 적 학교에 가기 전 머리를 땋아주시거나, 밥그릇 뚜껑으로 꽹과리를 치는 방법을 알려주시던 기억도 있다. 부모님이 바쁘니 할아버지가 우리를 많이 돌봐주셨던 것 같다.
엄마는 밤낮없이 일했다. 자식 욕심이 유별나서 우리에게 마당 한 번을 쓸게 하지 않았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밤이고 낮이고 그걸 해 먹이려고 애쓰셨다. 시집살이도 유별나게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그래서 몸이 빨리 망가진 것 같다. 여든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몹시 아프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창대회를 나가려고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쓰러지셨다. 눈앞에서 엄마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 어린 나는 너무 놀라 밤새 울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 다닌 6년간 내 이름은 민업이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민순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나는 민업이라는 이름이 참 좋았다. 6년 내내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아 똘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민업이라고 불렸던 그때가 내 평생 칭찬과 격려를 가장 많이 받았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엄마가 다시 쓰러지셔서 대학병원에 오래 입원을 하셨다. 가세가 기울어져 중학교 입학금을 낼 돈이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딸들은 공부하지 말고, 빨리 돈 벌러 나가라"고 하셔서 큰언니는 초등학교 졸업 후에, 작은언니는 중학교 졸업 후에 공장으로 떠났다. 나는 중학교를 못 보내주겠다고 하셔서 상심하고 있었는데, 작은아버지가 "공부 잘하는 애 학교 안 보내면 안 된다"고 입학금 8350원을 내주셔서 다행히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에는 정작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사춘기가 온 것인지 부쩍 외모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친구들이랑 사진관에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그때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에 시 구절을 적어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느 날엔 잡지에서 미스 롯데를 뽑는다는 걸 보고 그 시골에서 면접까지 보러 갔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떨어졌지만, 해보고 싶었다.
중학교 졸업 후 간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나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여군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내주면 여군이 되어서 집안을 돕겠다"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보내주시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오빠가 일하고 있던 인천으로 가서 라이터 공장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일하며 번 돈을 모아 '야간 전수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라이터 공장을 그만두고, 부산 파이프라는 곳에 사무 보조로 취직을 했다가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가지 않아 그만뒀다. 다니던 학교도 학비가 없어 자퇴했다. 어린 나이에 공부하고 싶은데, 가난이란 것이 너무 힘겨워 속상해 방황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중학교 졸업 후에 "막내 누나한테 가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남동생을 돌봐야 하니 취직을 해야 했는데 마침 친구가 '남성전기'라는 곳을 소개해 입사하게 되었다. 19살 무렵이었다. 전자회사라서 급여가 꽤 높았다. 4개월에 한 번씩 100% 상여금도 나왔다.
남동생이 공부하겠다고 해서,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나도 다시 공부해야겠다 싶어 야간 학교로 편입했다. 등록금을 낼 때마다 상여금이 나오니, 학비 걱정은 덜 했는데 월세방에 먹고 살기 바빠서 돈을 모을 겨를은 없었다. 일하랴, 공부하랴, 동생 뒷바라지하랴, 정말 정신없이 살았다. 학교를 다니며 취직도 했던 남동생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는 도시락 준비하느라 바빴다. 아침부터 곤로에 밥을 올리고 반찬도 두어 가지 준비했다. 그때는 오뎅볶음을 참 많이 했는데,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오뎅볶음을 잘 먹지 않는다.
퇴근하고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동생 저녁을 해서 먹이고, 동생 교복 빨래를 해야 했다. 동생이 잠든 후에야 나는 숙제를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동생이 "그때는 누나가 잠을 안 자고 사는 줄 알았다"라고 했다. 동생 입장에서는 자기가 잠들기 전까지 내가 일하고 있었고, 눈 뜨면 또 내가 일하고 있으니, 내가 잠을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정말 나는 생활력이 강했던 것 같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서 갑자기 쌀이 떨어졌던 때도 있었다. 마침 월급을 탔는데, 도둑이 들어 그 돈을 홀랑 도둑맞아 망연자실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진 않았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최대한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나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생이 대학을 가고 싶어 해서 당시 서울역에 있던 '대일학원'을 보냈다. 3년 대입 준비를 뒷바라지했지만, 동생은 대학에 떨어졌고, 군대에 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오빠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생 뒷바라지를 하면서 다녔던 '남성전기'는 자동차 스테레오를 만드는 회사였다.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했는데, 퇴근 시간이 정확해서 학교 다니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우리는 전자 기판에 핀 같은 부품을 심는 작업을 했다. 쉬는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동안은 한 눈도 팔 수가 없었다. 관리자는 남성이었고, 노동자는 전부 여성인 곳이었다. 그곳에 노동조합이 있었다.
*연재7-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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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롯데를 꿈꾼 17살, 라이터 공장에 취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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