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의대 교수 비대위 집단 휴진, 세브란스병원은 정상진료연세대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집단 휴진에 돌입한 지난 6월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의료원 산하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와 의료진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정민
의료계가 정말 원하는 사법 리스크 완화는 무엇인지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장애나 사망이 발생했을 때 긴 소송을 지속할 여력이 없습니다. 승소율 또한 경험적으로 매우 낮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사화된 유명한 사건들의 경우에도 상급심에서는 의료계가 승소한 사례가 다수입니다. 그럼에도 환자들이 법의 심판대로 의료사고를 가져가는 것은 주로 억울함이나 괘씸함 때문입니다.
의료계가 사법리스크에 분개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려 했는데 왜 법원을 가야 하냐는 억울함, 도덕적 불명예와 함께 소송 과정의 '지난함' 때문입니다. 검찰과 경찰과 같은 '수사기관'의 소환 조사를 수차례 거쳐야 합니다. 재판 과정에 들어가면 사법비용뿐만 아니라 심리적 압박감, 수년-십수 년에 걸친 시간은 금전적으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즉, 기피 의료의 의사들이 원하는 '사법 리스크 완화'는 1)수사특례, 2)기소특례이며 이것에 대한 '현실성 있는 주장'과 '구현 가능한 대안'을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환자를 위한 최선, 선의의 의료 행위에 대해서는 결과를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료계 측의 주장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또 '불가항력의 의료사고에 대해서는 고의가 아니라면 형사 처벌을 면제해야' 한다는 것 역시 '재판을 가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십시오!'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3. 정부는 한국의 '의료사고 사법리스크'를 먼저 정확히 파악하고 공개해야 합니다
현재 의료계 측에서는 대한민국에서의 의료사고 사법리스크가 미국, 영국, 유럽 등과 비교했을 때 100-700배가량 높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의료사고 형사 기소 건수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과장된 측면도 일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태로 2018년 의료진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지만 2022년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응급실의 사법 리스크가 논란이지만, 그동안 응급의료법으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문제는 사실관계 파악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내 의료사고 업무상 과실치사의 사례가 제대로 집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료계는 기소 건수나 입건 건수를 통해 추정하고 있지만, 환자 단체 측은 유죄율이나 배상이 높지 않다며 반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민사합의금이 부족하기에 형사합의금으로 그 모자란 민사합의금을 보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료분쟁의 기소율이 높은 것은 환자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사법부의 고육지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의료 분쟁에서 피해자-병원 간 합의, 의료조정분쟁원, 민사사건, 형사사건의 기소율, 유죄율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정부는 현재 한국의 '의료사고 사법리스크'를 정확히 파악하여 공개해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의 의사들이 정말 터무니없이 높은 사법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료계가 과장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부가 현실을 정확하게 연구하고 의료계와 국민들에게 설명하여야만 이 불필요한 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4. 의개특위의 의료사고 사법리스크 완화 정책은 긍정적인 방향이 분명 있습니다
의료사고에서 배상금은 치료비나 위자료 자체보다는 환자가 앞으로 살아가며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수익인 '일실이익'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기대여명이 긴 소아, 신생아, 소득이 높은 전문직에서 배상금이 천문학적으로 커졌고, 이 분야에서 의사들의 기피를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의개특위에서 '불가항력 의료사고'의 범위를 분만에서 중증 소아·중증 응급으로 확대하는 것과 같은 방향성에 대해 의료계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형사 합의금은 의사 개인이 책임지고, 민사 배상금은 병원에서 책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 입장에서는 보험이나 공제조합을 통하거나, 규모의 경제를 통해 직접 배상으로 의료사고 비용을 해결해왔습니다만, 의사 개개인에게는 수억 원의 배상 비용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통해 단순 과실의 민사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기피 의료 의사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이고, 환자들로서는 의료 혜택이 늘어나는 상호 이익의 정책입니다.
#5. 그러나, 의료사고 사법리스크 완화정책은 불완전합니다
첫째, 여전히 의료사고 사법리스크 완화 정책의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2월 1일 필수의료패키지에 포함되었던 내용인데, 10개월이 지나서야 '검토'수준이 나왔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진작에 법제화까지 되었다면 기피 의료 의사, 젊은 의료인들에게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정부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은 여전합니다. 이전에도 여러 정책과 합의들이 시행되었다가 손바닥처럼 뒤집히거나 정권에 따라 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미 의대 증원, 전공의 처벌 등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말을 바꾼 정부를 젊은 의사들은 신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은 기피 의료 선택을 망설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개특위 5차 회의는 '의료사고 시 유감 표시 제도화'를 논의했던 바 있습니다. 의료진의 사과를 법적 증거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인데, 환자-의사 관계가 훼손되지 않게 하고, 소송으로 이행되는 비율을 낮춰줄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료계는 의사의 사과가 과실 인정으로 여겨 온 정서나 현실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직접 증거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환자들은 의사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고 소송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셋째, 이 정책이 시혜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나라마다 사법제도와 의료제도가 다르다지만, 해외에서는 의사를 형사로 기소하는 사례가 1년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지금처럼 의료사고 사법리스크가 있다면 의사들은 소송의 위험, 배상의 책임이 큰 수술, 분만을 기피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10년 치의 한 세대 젊은 의사들이 사직서를 내고 기피 의료를 탈출했습니다. 과연 2000명 증원을 한들 그들이 그런 사법리스크를 질지 의료계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능동적인 행위를 하는 데 본인의 면허를 걸고, 재판을 받거나 조사를 받을 위험을 감수하기를 꺼리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역에 강제로 배치하거나, 군의사를 동원하거나, 공공의사를 선발·활용하거나, 지역의사제를 시행하면 책임 회피는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소아 신경과 의사가 손을 놓아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산부인과 의사가 손을 놓아 산모와 신생아가 죽어나가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고 사회적 자본의 붕괴입니다. 환자와 소비자를 위해서도 이 의료사고 리스크를 줄이는 것은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과실 여부 판단 자체가 사회적 비용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만든다고 한들, 또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행정 절차로만 남을 수 있습니다. 의료계에 대한 부담은 경감시키지 못한 채, 환자들에 대한 보상도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까 의료계는 우려합니다.
다섯째, 정부의 다른 의료개혁 논의와 마찬가지로 재원에 대한 논의가 부족합니다. 지금처럼 1.2%의 위험도 수가를 통한 배상 보험을 활용한 보상은 대형병원들의 배를 불리고, 환자들에게 정당하고 공정한 보상을 주지 못하며, 개별 의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왔습니다.
의개특위는 불가항력 의료사고 범주에는 국가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공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의료사법리스크 완화 전반을 공공 재원화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6. 정부의 의료개혁은 '일단 멈춤' 해야한다는 것이 소비자와 의료계의 공통 의견이며, 대안은 있습니다
이미 현 정부의 의료개혁은 신뢰와 추진력을 잃었다는 것이 시민사회와 소비자, 공급자인 의료계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이미 10월 31일 녹색소비자연대, 소비자시민모임, YWCA 연합회, 서울대교수비대위, 사직 전공의 등이 연대한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함께 만들어가는 의료소비자-공급자 공동행동'은 의개특위의 '일시 멈춤'을 요구한 바가 있습니다.
의료사법리스크의 대안으로는, 첫째로 뉴질랜드·스웨덴·덴마크 등과 같이 '무과실 의료사고 보상 제도'의 도입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 행정적 비용과, 필수의료 기피나 환자의 정신적 고통 혹은 환자-의사 관계의 붕괴와 사회적 비용을 생각한다면, 과실 여부에 상관없이 환자가 보상을 받도록 하는 것이 더 비용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산재보험에서의 근로복지공단과 같은 '제3의 소송 주체 도입'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의 예시에서,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직접 소송을 하지 않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소송 주체가 되어 사용자를 대리하고, 배상까지 책임집니다. 의사는 소송 과정에 시달리지 않고 보험료만 내면 되고, 환자들은 체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환자의 장애나 가족의 사망에도 위로받는 일은 매우 드물고, 배상을 받더라도 금액은 매우 적습니다. 소송 시간은 수년에서 십수 년으로 매우 길며, 승소율 또한 대단히 낮습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도 이 대안은 이익입니다.
설령 법적인 문제로 형사소추의 길을 원칙적으로 봉쇄할 수 없다 해도, 환자와 기피과 의사에게 분명한 이익이 되는 정책들을 만들어낸다면, 자연스럽게 아무도 소송의 길을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산골 응급실 의사인 저부터도 매일 밤 17억의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면허를 거는 심정으로 진료를 보고 있습니다. 과장된 두려움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 치료가 필요할 때 주저하고 방어진료를 하게 되거나, 상급병원에 전원을 보내게 되니 자괴감이 듭니다.
제시된 대안을 통해 환자를 위한 신속하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고, 의료계에 대한 처벌·기소·수사에 대한 광범위한 특례가 적용되는, 공급자-소비자 모두가 신뢰하고 만족하는 건강한 의료환경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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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골에서 일하는 일차, 방문, 응급 의료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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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응급실 의사가 본 의료사고 사법리스크 완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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