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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넘어가는 나미비아 국경

오늘도 별을 보면서 국경을 넘는다. 특히 달이 보름달이어서 국경을 넘는 여행객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나미비아 국경 사무소를 떠난 버스는 오렌지강을 끼고 달리다 바로 오른쪽의 길로 꺾어 달린다. 왼쪽으로 가는 길은 나미비아가 자랑하는 피시리버캐년의 골짜기로 가는 길이다. 길이가 160km나 되는 피시리버캐년은 미국의 그랜드캐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골짜기이다.

나미비아 국경을 넘어 빈트후크로 달려가기 시작한 시간은 밤 10시. 이 시간쯤이면 짙은 어둠이 깔려 차창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세계여야 하는데, 나미비아의 밤은 그렇지 않다. 차창의 커튼사이를 통해 도로의 풍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도로의 가로등이 있어 밤 풍경이 보이는 것인지 잠시 의아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에 가로등이 있을 리 없다. 위도 때문인지, 사막지대여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 칼라하리 사막이 있는 지역을 지나고 있다.

보름달이 하늘 중간에 떠서 태양 같은 가로등 역할을 해서 그런가. 나미비아에는 캄캄한 어둠의 밤은 없다. 흐릿한 백야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빈트후크로 가는 길 내내 계속되었다. 플래시 없이 밤거리를 다닐 정도로 밤이 밝다. 저 멀리 나미브사막의 붉은 모래언덕을 비춘 태양의 반사가 나미비아의 도로를 밝히는 것일까. 나도 더 이상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여행에서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너무 과학적 접근은 피곤할 뿐 아니라 여행이 갖는 감정적 접근을 방해할 테니.

버스는 어둠속에서도 몇 시간마다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주유소에 딸린 정류장들은 모두 새벽에 달리는 버스들을 위해 24시간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뤼나루와 카이트만스후프, 마리엔탈, 레호보트를 지나 빈트후크에 도착했다. 레호보트 못 미쳐 남회귀선이 지나가는 표시가 있으나 잠이 들어 그냥 지나쳤다. 새벽 5시에 내린 빈트후크는 어둠이 깔려 희미하게 들어왔다. 겨울철에 나미비아가 남아공에 비해 한 시간 빠른 시차를 감안하면 모두 20시간 걸린 셈이다.

여대생은 타고 온 버스로 스와콥문트로 떠나고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여행객 숙소를 찾아 택시를 탔다. 가장 싸다는 카드보드 박스 백패커스에 갔으나 현관문이 잠겨 있다. 너무 이른 새벽이다.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다. 새벽이라 걸어서 시내 구경을 할 수도 없다. 현관문 앞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일하는 중년의 여자가 와서 숙소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은 방이 있느냐.”
“나는 청소하는 사람이어서 잘 모른다. 매니저가 오면 물어봐라.”
“매니저는 언제 오느냐.”
“아마, 한 시간 후에 올 것이다.”

한 시간 이상을 숙소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매니저라는 젊은 여자가 한참이 지나 출근했다. 모든 방이 꽉 차서 없단다. 다른 숙소에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자 매니저는 몇 군데 전화를 하더니 역시 빈방이 없다고 한다. 날도 밝아 환해져서 나는 직접 숙소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피시리버캐년의 모습
 피시리버캐년의 모습
ⓒ 로렌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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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아리아가 들리는 빈트후크

빈트후크는 거리 이름부터 아름답다. 카드보드 박스 백패커스에서 나와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 첫 번째 거리가 베르디 거리이다. 두 번째는 브람스 거리이고, 아래로 로시니 거리와 모차르트 거리, 푸치니 거리, 바흐 거리가 나를 반긴다. 세계적 작곡가들의 이름을 딴 거리들이 즐비하다. 바흐와 브람스,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과, 베르디와 로시니,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가 들려오면서 배낭을 멘 나의 발걸음도 땅 위에서 껑충 껑충 뛰어 오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아리아가 잔잔히 들려오는 듯하다. 귀에 익은 남자주인공, 바람둥이지만 뒤늦게 후회하는 만토바 공작의 감미로운 테너 아리아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눈물을 흘리며 방긋 웃는 얼굴로 남자를 속이는 여자의 마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 변합니다, 변합니다, 변합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멋진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나를 즐겁게 한다. 빈트후크는 첫 인상부터 사랑스런 도시이다.

여행객 숙소인 카멜레온 시티 백패커스와 푸치니 하우스로 갔으나 역시 내 자리는 없었다. 유럽의 여름 휴가철과 맞물리는 아프리카 8월은 최고의 성수기이다. 내가 예약한 것은 오직 떠나는 비행기와 돌아오는 비행기 표이다.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은 현지에서의 여행 일정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미리 예약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지에 가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발품을 조금 팔면 거의 해결이 되는데, 워낙 성수기라 숙소 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 이상 싼 숙소를 구할 수도 없고, 나도 한 시간 이상을 배낭을 메고 땀을 흘렸다. 푸치니 하우스 옆에 있는 개인집 형태의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폰델호프 게스트하우스(Vondelhof Guesthouse)’였다. 짐바브웨의 그레이트짐바브웨 입구에서 보았던 산호나무 꽃이 활짝 핀 독일 중세풍 집인데, 깔끔하고 지붕이 붉은 색이다.

독일계 백인여성인 주인은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역시 방이 520나미비아달러나 되었다. 미국 돈으로 70달러이다. 투숙객들도 나이든 가족단위가 많다. 아프리카 여행 중 투숙한 가장 비싼 숙소였다.

오랜 버스 탑승과 방을 잡느라고 한 시간 이상 걸어 피곤이 몰려왔다. 오전에는 숙소에서 자고 오랜만에 편안한 샤워를 했다. 샤워실의 비누가 고급스럽다. 라벤더 비누의 향이 온 몸에서 나고 매끄럽다. 내 몸도 피부도 지난 두 달 동안 피곤에, 햇볕에 너무 혹사당했다. 좋은 숙소에 묵으니 내 몸이 오래간만에 호강하는 날이다.

인터케이프버스 정류장 앞의 빈트후크 시내 모습
 인터케이프버스 정류장 앞의 빈트후크 시내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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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생긴 기베온 운석이 눈길을 끈다

시내구경을 위해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철도가 보인다. 빈트후크에서 스와콥문트까지 달리는 트랜스나미브 철길이다. 나미비아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삼 누조모 드라이브’ 거리를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꺾었다. 쇼핑센터인 포스트 스트리트 몰 거리이다.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많았다.

나는 한 식당에 들어가 돼지고기를 찐 것을 골랐는데, 입맛에 딱 맞았다. 아프리카에서 돼지고기를 먹기도 처음이다. 나미비아에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바로 남아공 화폐인 랜드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미비아는 남아공 화폐인 랜드를 나미비아달러와 1:1대 똑같이 가게에서 받는다. 나도 남아공 랜드만 갖고 가서 사용했다. 남아공 랜드를 내면 거스름돈은 똑같은 가치로 나미비아 랜드로 준다. 실제 시장가치에서는 남아공 랜드가 나미비아달러보다 높아 거꾸로 남아공에서는 나미비아달러를 1:1로 바꿔주지 않는다.

쇼핑센터의 작은 광장에서는 아프리카 전통 공예품들을 길거리에 팔고 있는데, 내 눈에 띈 것은 검은 돌덩어리였다. 마치 칠면조를 훈제해 꼬치에 꽂아 전시해 놓은 것 같은 모양의 돌이다. 생긴 모습을 보면 뭐 저리 못생긴 돌을 전시해놓았나 생각하겠지만, 생김새만 보고 사물을 판단하면 큰 일 난다. 사물이 갖고 있는 의미와 역사를 봐야 한다.

그 유명한 ‘기베온 운석’이다. 기베온(Gibeon) 운석은 나미비아 남부의 기베온 지역에 떨어진 운석을 말한다. 운석은 대기권 밖에서 날아와 지구상에 떨어진 돌덩어리를 말하는데, 흔히 별똥이라는 것이다.

40억 년 전에 만들어져 우주 공간을 떠돌던 별똥이 떨어지던 당시의 상황이 그려진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먼 옛날 우주를 떠돌던 커다란 돌덩어리가 나미비아 사막 지대에 갑자기 떨어졌다. 커다란 하나의 돌덩어리가 지구의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여러 개의 작은 돌덩어리로 깨어지면서 떨어졌다. 그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서 우박이 쏟아지는 듯 했다. 가뭄에 물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당시 사막지대에 살던 산족들은 하늘에서 마침내 비를 뿌린다고 좋아해서 나무집에서 나와 덩실 덩실 춤을 추웠다.

그런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우박은 정작 필요한 비는 몰고 오지 않고  땅에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어 버렸다. 어떤 검은 우박은 산족들의 나무집 위로 떨어져 산산조각을 내버렸고, 재수 없는 산족의 젊은이는 검은 우박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대재앙이었다. 산족들은 오랫동안 하늘의 저주라고 생각해 검은 우박이 떨어진 근처를 가지 않았다. 한 세대가 지난 뒤 호기심 많은 산족의 손자들이 검은 우박을 돌로 깨어보니 단단하고 은색의 색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족들은 검은 우박이 별똥이라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된다. 산족들을 별똥을 깨고 갈아서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사용했다.

기베온 지역에는 모두 15t가량의 철 성분의 운석이 떨어졌는데, 빈트후크 쇼핑센터 거리에는 77개의 운석 중 33개가 전시되어 있었다. 작게 보이는데 무게가 적은 것이 200kg이고, 큰 것은 무려 500kg이 넘는다고 한다. 지구 대기와 마찰하면서 다 타버리고 남은 철성분의 단단한 돌덩어리다보니 일반 돌 크기와 비교해 훨씬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나미비아에서는 세계 최대의 운석도 발견되었는데, 북부의 그루트폰타인 근처의 호바 농장에 떨어진 호바운석은 무려 60t이나 된다.

독일 신교파 루터교회인 크리스투스키르헤
 독일 신교파 루터교회인 크리스투스키르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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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빈트후크 시내의 아가씨들

빈트후크 시내를 그냥 걸었다. 발길을 당기는 도시이다. 독일식 건물의 고풍스런 분위기와 현대적 건물의 조화가 아름답다. 독일식 건물은 대부분 빨간색 지붕이고, 현대적 건물은 하얀색이어서 대비된다. 독일 식민지의 영향이 여전히 그대로 곳곳에 남아 있다. 독일에 이어 네덜란드계 백인정권이었던 남아공의 지배를 받아 독일풍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빈트후크(Windhoek)란 이름도 아프리칸스어로 ‘바람(Wint)이 부는 모퉁이(Hoek)’에서 따온 것.

거리도 깨끗하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조용한 전원도시 같은 분위기이다. 가장 번화가인 인디펜던스 애브뉴 거리는 현대식 쇼핑센터와 카페들이 즐비하다.

여자들도 고급스런 의상에 멋을 부리고, 사람들이 여유 있는 모습이다. 아프리카인이라고 “뭐, 패션까지?”라고 얕잡아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세련되고 활동적인 나미비아 여성들을 보면 유럽이나 뉴욕의 멋쟁이 여성들에 하나도 처지지 않는다. 개방적이면서도 깔끔하다는 것이 나미비아 여성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케이프타운이 백인이 많은 영국풍의 도시라면, 빈트후크는 흑인이 많은 독일풍의 도시이다.

그러면서도 전통이 함께 하는 도시이다. 창이 넓은 둥근 모자와 다양한 색상의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니는 헤레로족 여인과 레게 머리 스타일에 목 뒤쪽으로 걸치는 장신구를 달고 다니는 힘바족 여인 등을 볼 수 있다. 헤레로 여인의 전통의상은 사실은 19세기 독일 선교사 부인들의 옷에서 따온 것으로 얼핏 보면 풍성한 모양의 영국 빅토리아 시대 의상 같다.

헤레로족도 힘바족과 함께 유목인이었기 때문에 웃옷은 거의 입고 다니지 않는 등 의상이 발달하지 못했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오밤보족과 헤레로, 힘바족, 아프리카너 백인과 독일계 백인 등 11개 인종이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 빈트후크는 1890년 독일의 총독부 수도로서 건설되어 지금 24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나는 늘 그렇듯 박물관을 제일 먼저 찾았다. 빈트후크 걸어서 구경하기는 제일 번화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디펜던스 애브뉴 거리와 피델 카스트로 거리가 만나는 사거리다. 쿠바의 혁명가이자 대통령 이름을 딴 피델 카스트로 거리를 따라 언덕길을 올라갔다. 올라가는 언덕길 왼쪽에는 동물원 공원이라는 뜻의 주 파크(Zoo Park)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아프리카 전통 공예품들을 파는 길거리 시장이 유명하다. 그 옆은 바로 내가 오늘 새벽 인터케이프 버스를 타고 내린 정류장이고, 위로는 대법원 건물이 보였다.

최초의 독일식 초등학교 건물인 카이저리헤 에알슈레
 최초의 독일식 초등학교 건물인 카이저리헤 에알슈레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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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에도 강요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언덕길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은 겉으로 봐도 한눈에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탑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다. 1907년 지어진 크리스투스키르헤라는 이름의 독일 신교파 루터교회이다.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인 이 교회는 붉은색 철탑과 하얀색 창문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마치 동화 속의 아름다운 건물을 보는 듯하다.

그 오른쪽 옆으로는 1908년 지어진 최초의 독일 초등학교 건물인 카이저리헤 에알슈레가 있고 그 위쪽 언덕 위에 하얀색의 건물이 지금은 나미비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알테 페스테이다. 빈트후크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건물로 1890년 독일군의 요새 겸 군인막사로 지어졌다. 빈트후크에는 이처럼 100여년이 넘은 독일식 건물들이 많은데, 독일이 식민지배를 하던 초기에 만들었다.

나미비아는 일찍이 1885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식민 지배를 받다가 세계 1차 대전 후인 1920년부터 국제연맹에 의해 남아공의 위임통치를 받아왔다.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나미비아를 계속 점령을 하다 1990년에야 뒤늦게 독립을 허용했다. 독일에서 남아공으로 종주국만 바뀐 채 식민 지배를 받아온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로는 가장 늦게 독립한 나라이다.

남아공은 나미비아 통치시절 악명 높은 흑백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이곳에도 적용했다. 빈트후크 시내에서 흑인들을 외곽으로 쫓아냈다. 외곽의 흑인 빈민촌 ‘카투투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인데, ‘나미비아의 소웨토’로 불린다.

알테 페스테는 나미비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박물관이고, 그 아래의 카이저리헤 에알슈레도 박물관의 일부로 각 부족의 공예품과 도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카이저 에알슈레에는 보츠와나 오카방고 델타에서 탔던 모코로 같은 통나무배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자연사와 인류학 박물관은 오웰라 박물관으로 알테 페스테와는 별도로 언덕 건너편에 떨어져 있었다.

나미비아 역사박물관인 알테 페스테
 나미비아 역사박물관인 알테 페스테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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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이 나미비아를 강제 점령한 이유는

알테 페스테 박물관은 역사박물관답게 나미비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초기 원주민인 산족의 이주와 삶, 독일의 식민지배, 헤레로족의 봉기 등 독립투쟁, 다이아몬드의 발견, 남아공의 통치와 독립 등으로 시대별로 전시를 해 놓았다. 박물관에 전시된 물품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미비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한 눈에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은 역시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본 다음에 현장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다.

왼쪽으로는 최근 역사인 나미비아 독립투쟁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것은 3개의 유리잔이다. 앙골라와 쿠바, 남아공 대표단이 평화협정을 맺고 들었던 포도주 잔이다. 박물관에 무슨 포도주 잔을 전시해라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가 담겨 있는 잔이다.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는 단순한 술잔으로 비칠 수도 있고, 유물이 될 수도 있다.
3개국 협상 대표의 사진과 포도주 잔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마운트 에초 선언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축배의 잔”이라고.

마운트 에초 선언은 1989년 4월 8,9일 빈트후크 북쪽의 칼프펠트 근처에 있는 산인 마운트 에초(Mount Etjo)에서 3국 대표가 모여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나미비아에 진격한 나미비아 무장 독립투쟁 단체인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스와포.SWAPO) 병력을 앙골라로 철수시키는 대신, 나미비아의 독립을 인정한 1988년의 브라자빌 의정서를 실천한다는 합의다. 스와포는 나미비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삼 누조마가 이끌고 있었다. 독립투쟁을 위한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최초의 게릴라부대였다. 마운트 에초 선언은 나미비아 독립의 평화적인 이양과정에서 중요한 선언이다.

남아공이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나미비아를 강제 점령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무엇보다도 하나는 나미비아의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광물에 욕심이 있었다. 나미비아는 세계 3번째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다. 남쪽 대서양 해안도시인 뤼데리츠는 대표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지이다.

두 번째는 백인정권이었던 남아공은 주변 앙골라의 영향으로 나미비아가 공산화될 것을 우려했다. 앙골라는 오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부터 1975년 사회주의 정권으로 독립했으나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냉전체제의 대결장이 되었다. 남아공이 미국의 편에서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고, 쿠바는 1975년 11월 정부군을 돕기 위해 아예 군병력을 앙골라에 파견했다. 앙골라 자체가 미국과 남아공, 소련과 쿠바의 대결장이 되었다. 27년간의 앙골라 내전으로 숨진 사람이 5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앙골라는 학살과 폭력, 야만과 양심의 파괴만이 판을 쳤다.

세계사는 외세가 개입하면 죽어나는 것은 그 나라 국민과 영토이고, 그 후유증은 오래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것이 이념의 대리전이라고 하면.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독립 이후 냉전의 대리 전장이었다. 내가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봤던 영화 “영웅(The Hero)”도 바로 앙골라 내전을 다룬 내용이었다. 결국 유엔과 세계 여론의 압력에 밀린 남아공은 앙골라에 주둔한 쿠바군의 철수를 전제로 나미비아의 독립을 허용한다. 마운트 에초 선언에 앙골라와 쿠바, 남아공 3대표가 참석한 이유이다.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산족의 바위그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산족의 바위그림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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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살아 있는 산족의 바위그림

오른쪽 전시관에는 산족의 바위그림(암벽화)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위그림은 화석과 함께 아프리카 유물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유형의 역사이다. 문자가 없어 기록문화가 거의 없고, 입을 통한 구전문화만 있는 아프리카에서 바위그림은 한편의 뛰어난 예술이자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역사자료이다. 훌륭한 예술가였던 산족은 문자 대신 동굴 속의 바위그림을 통해 후대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려고 했다.

산족들이 창을 들고 동물을 사냥하는 바위그림과 실제 돌에다 기린을 새긴 바위조각 등 다양한 바위그림이 놓여 있었다. 주로 바위그림은 천연물감으로 바위에 그림을 그린 암벽화인데, 기린 바위조각은 바위에 조각한 암각화여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산족은 다양한 색상으로 바위에 그림을 그린 위대한 화가이자, 돌에 조각을 한 위대한 조각가였다.

기린 바위조각은 북서쪽 브란드버그 산맥의 돔 형태의 둥근 꼭대기 골짜기(Brandberg Dome Ravine)에서 발견한 것으로 1천년 이상 되었다. 브란드버그 산맥은 유명한 ‘하얀색의 부인’ 바위그림 등 4만점 이상의 바위그림이 동굴과 골짜기에서 발견되었다. 설명문에는 바위그림의 동물 가운데 기린이 가장 많은 이유에 대해 “무당에 의한 원시종교인 샤머니즘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 주술사들은 기린을 정령으로 생각해 점을 치거나 병을 치료했다. 또한 “아프리카는 인류의 요람 일 뿐 아니라 세계 예술의 기원”이라며 바위그림의 역사를 강조했다.

기린은 비단뱀, 코끼리와 함께 산족들이 신성시하는 3대 동물이다. 산족들이 살던 남아공과 보츠와나, 나미비아, 짐바브웨, 잠비아 등의 바위그림들에도 주로 이 세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보츠와나 북서부의 초딜로 언덕(Tsodillo Hills)에서 발견된 비단뱀 바위조각(암각화)은 무당의 종교의식에 이용된 것으로 무려 7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종교와 문화까지도 아프리카에서 전파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비단뱀 바위조각이 발견된 동굴에서는 비단뱀과 기린, 코끼리만 발견되었다.

박물관은 별도의 입장료는 없으나 기부금을 받고 있었다. 박물관 나오는데 어머니와 딸이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하는데 독일어를 사용한다. 역시 과거 독일의 식민지여서 독일 사람들이 많다.

독일병사의 희생을 기리는 기마상인 라이터 덴크말
 독일병사의 희생을 기리는 기마상인 라이터 덴크말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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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종주국의 희생자를 기리는 '이상한' 나미비아

박물관과 루터 교회 사이의 언덕 위에 백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다. 의아했다. 백인이 오른손에 총을 들고 말을 타고 있는 구리상이다. 나미비아를 위해 독립 운동을 한 백인을 기린 것인가. 궁금했다. 가까이 가서 보았다. 기마상 기념물이라는 뜻의 독일어인 ‘라이터 덴크말(Reiter Denkmal)’ 앞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헤레레와 나마족의 봉기과정에서 숨진 1628명의 독일병사와 4명의 여성, 한 명의 어린이를 추모한다.”

도대체 누구를 기리는 내용인가? 세계 어디를 가도 식민 지배자의 사망을 기리는 구리상은 처음 본다. 독일 식민지배에 항거하다 숨진 나미비아의 헤레로와 나마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누가 침략자이고 누가 주인인지, 누가 학살자이고 피해자인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1904년부터 1907년 사이에 헤레로와 나마족이 빈트후크 북쪽 오카한자에서 일으킨 식민지배 투쟁 과정에서 독일이 저지른 인종말살 정책은 유명하다. 당시 독일에 의해 학살된 나미비아인은 7만5천명 이상이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유태인 학살이 보다 먼저 자행한 헤레로족 인종말살은 ‘첫 번째 인종학살‘로 불린다.

당시 독일 점령군 사령관은 “독일 영토 내에 있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기 소지여부와 상관없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우물에 독을 풀어 죽였고, 사막으로 쫓겨난 헤레로족은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갔다. 데이비드 데이는 책 <정복의 법칙>에서 역사상 정복자에 의한 대표적인 인종말살 정책으로 다음을 꼽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1904년의 헤레로족 학살, 1915년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1925년 쿠르드족 학살, 미국의 인디언 체로키족 학살, 호주의 태즈매니아인 학살 등. 스벤  린드크비스트도 책 <야만의 역사>에서 아프리카에서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흑인말살 정책인 “모든 야수들을 절멸하라”의 대표적 사례로 독일의 헤레로족 학살을 들었다.

학살자들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기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독일군 기마상을 보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독립이 된지 16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식민지배자의, 그것도 인종학살의 책임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이유를. 물론 이 기마상은 1912년 당시 독일 총독에 의해 세워진 기념물이다.

루터교회인 크리스투스키르헤 안에도 당시 학살에 참여 했던 독일군 희생자의 명단과 이를 기리는 기념판이 있고, 독일 정복자로서 총독을 역임했던 쿠르트 본 프란코이스 구리상도 빈트후크 건설자라는 이유로 시내에 세워져 있다. 옛날 동물원이었던 주 파크에는 ‘전쟁기념비’가 있는데, 헨드릭 비트부이가 주도한 나미비아 해방봉기 때 이를 진압하다 숨진 독일병사들을 위한 추모탑이다.

북한이 건설한 나미비아 영웅묘지

헤레로족이나 나마족 등 나미비아의 해방투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탑은 지난 2002년 8월에야 빈트후츠 시 남쪽 외곽 10km에 ‘영웅묘지(The Heroes' Acre)’가 조성되었을 뿐이다. 시 외곽에 있고, 여행정보 책자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으니 찾을 여행객이 거의 없다. 나도 시간상 찾을 수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웅묘지의 기념물은 모두 북한의 ‘만수대 해외프로젝트 회사’가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시내에도 멩기스투 공산정권 시절 ‘주체사상탑’을 지어주기도 했다.

빈트후크시가 펴낸 책자에 나와 있는 영웅묘지 기념탑을 보니 뾰족한 오벨리스크 같은 탑과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평양의 대동강변에 있는 주체사상탑의 모양과 비슷하다. 아디스아바바의 주체사상탑도 비슷하다. “나미비아의 모든 아들딸들의 피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들이 흘린 자유의 피는 나미비아의 현재와 다음 세대에 의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는 나미비아 건국의 아버지인 삼 누조마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 영웅묘지 기념탑에 새겨져 있다고 책자는 말한다.

수도의 중심가에 세워져 있는 기념탑은 나라의 역사이고 정체성이다. 정복자와 침략당한 자의 역사를 같이 보여주자는 취지인지, 아니면 독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 실익차원인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서울 한복판에 일본 총독과 일본군의 위령탑을 세워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더욱이 빈트후크 시내에서는 정작 헤레레족이나 나마족에 대한 희생 기념탑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미비아 대통령 집무실
 나미비아 대통령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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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종주국 희생자의 맞은편에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구리상의 모순

루터교회 뒤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의회 건물이 나온다. 옛날 독일의 총독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틴텐팔라스트라고도 불리는 데, 독일어로 ‘잉크 왕궁’이라는 뜻이다. 독일 식민지배 시절 공식문서와 서류에 사용된 잉크를 총독부에서 너무 많이 사용해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눈에 뛰는 것은 의사당 앞에 있은 세 사람의 구리상이다. 독일의 식민지배와 남아공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 운동가들이다.

첫 번째는 헤레로족 지도자인 호세아 쿠타코(1870~1970)이다. 독일 식민지배와 남아공 점령에 대항해 싸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빈트후크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고, 내가 묵었던 숙소의 바로 앞 큰 길도 그의 이름이다. 두 번째는 테오필루스 하무툼반겔라(1917~1990)이다. 영국 성교회 신부로 남아공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세 번째는 캡틴 헨드릭 사무엘 비트부이(1906~1978)이다. 캡틴 비트부이는 남아공 백인정권이 나미비아에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도입하자 “나는 우리 땅의 일부가 아니라 나미비아 전부를 원한다”며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싸웠다.

'캡틴(대장)‘ 비트부이는 나미비아 지폐에 나오는 나마족의 추장인 ‘치프(추장)’ 비트부이와는 다른 인물이다. 치프 헨드릭 비트부이는 나마족 지도자로 최초로 독일의 지배에 저항했던 인물로 1904년 헤레로와 나마족 봉기를 주도하다 1905년 살해당했다. ‘추장’ 비트부이는 나미비아의 10, 20, 50, 100달러 등 모든 지폐에 등장하는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의사당 건물에는 독일 제국주의와 남아공의 지배에 저항했다 희생된 독립투사들을 기념하는 구리상이 서 있고, 그 앞 언덕에는 독립투사들을 학살했던 식민지배자의 군대를 추모하는 구리상이 우뚝 솟아 있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역사에서 같이 할 수 없는 이 모순된 장면을 바라보니 착잡하다. 오랫동안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여행객이서 더욱 그렇다.

나미비아 옴부즈맨 건물의 구호와 상징물
 나미비아 옴부즈맨 건물의 구호와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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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옴부즈맨 건물의 구호와 상징물

다시 돌아 나오다 루터 교회 앞에 있는 건물을 보니 반갑다. 나미비아 옴부즈맨 건물이다.
옴부즈맨은 시민의 입장에서 행정을 감시하는 시민참여형 민주주의 상징이 아닌가. 시민의 입장에서 행정을 감찰하고 민원을 해결하는 선진국 제도가 바로 옴부즈맨이다. 스웨덴 등 유럽 선진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옴부즈맨 건물이 있을 정도로 국민의 의견을 중시하나 보다.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정치가 안정되고, 민주주의가 상당히 정착된 나라로 꼽힌다.

지난 1990년 독립 한 뒤 독립 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삼 누조마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재선 규정을 고쳐 3선을 마친 뒤 약속대로 2005년 물러남으로써 민주화의 기초를 다졌다. 대통령 임기는 우리와 같은 5년이지만, 3선까지 가능하다.

옴부즈맨 건물의 정문에 걸려 있는 구호와 상징물이 참 재미있다. “다른 면의 이야기(The Other Side of The Story)”라는 구호와 함께 한 사람 얼굴의 두 반쪽을 다른 색으로 칠한 상징물이 붙어 있다. 모든 사물에는 두 면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행정부의 입장이 아닌, 국민의 입장에서 사연을 들어본다는 취지이기도 하다. 정부기관도 이렇게 재치 있고 멋있게 홍보할 수가 있구나.

옴부즈맨 건물을 지나 로버트 무가베 거리를 따라 언덕 아래 길로 내려오는데 사람 다니는 길이 막혀 있고,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산호나무가 불타는 꽃을 피우고 있어 사진을 찍으니 군인들이 손짓으로 찍지 마라며 건너편 길로 가라고 지시한다. 건물을 보니 아차, 나미비아 대통령궁이다.

빈트후크 시내에 쿠바 대통령인 피델 카스트로와 짐바브웨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것은 이들이 삼 누조마 초대 대통령이 이끄는 스와프가 독일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할 때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빈트후크 시내의 쿠두 동물 구리상
 빈트후크 시내의 쿠두 동물 구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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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보는 쿠두 동물 기념 구리상

시간이 저물어 더 이상 구경을 못하고 서둘러 왼쪽으로 돌아 인디펜던스 애브뉴 거리로 나오니 동물 구리상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영웅의 구리상은 많이 보았어도 동물을 기념하는 구리상은 처음이다. 가장 번화한 수도의 중심가에 동물 구리상을 보니 기쁘다. 아프리카에 최소한 동물 구리상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닐까. 동물 구리상의 주인공은 쿠두다. 커다란 영양으로 나미비아 50달러 지폐에도 나오는 동물이다.

동물 구리상에는 독일의 벤젠이라는 사업가가 1960년 쿠두 구리상을 세워 시에 기증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지난 1896년 나미비아 쿠두를 거의 전멸시킬 정도로 번진 전염병으로 희생된 쿠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염병으로 숨진 쿠두를 기리는 동물애호 정신을 보니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나미비아가 더 멋있어 보인다.

인디펜던스 애브뉴 거리에는 아프리카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과 거리의 행상들이 많다. 산족의 고향답게 “부시맨 공예품(부시맨 아트)”이라고 간판을 단 기념품점에 들어가 보니 많은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로 나무로 만든 것들인데, 배가 볼록 나온 임신한 여인의 조각품, 우리의 탈 같은 얼굴 나무 조각품 등이 있다.

궁금했던 새의 이름을 알려준 자연사 박물관

다음날도 나는 빈트후크 구경에 다시 나섰다. 이틀째 빈트후크 탐방이다. 사막투어에 자리가 없어 부득이 하루 늦게 출발하는 투어에 합류해야 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간신히 갈 수 있었다. 빈트후크 시내 거리 구경은 항상 동물원 공원이라는 주 파크(Zoo Park)에서 시작한다. 옛날 동물원이 있었던 자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지금은 동물원이 아니다.

야자수가 많이 심어진 주 파크에는 연못도 있고, 작은 야외 공연장도 있고, 정자도 있어 내 눈을 끈다. 젊은이들은 공원 잔디밭에서 누워서 쉬기도 한다. 그런데 웬 중국식 보름달 다리와 정자가 있다. 중국의 상하이시가 나미비아에 선물한 ‘중국-나미비아의 우정의 다리와 상하이-빈트후크의 우정의 정자’였다. 중국은 아프리카 곳곳에 진출하지 않은 곳이 없다. 전날 인디펜던스 거리에서 보았던 쿠두 구리상처럼 인상적인 조각상이 있다. 코끼리의 해골상이다. 공원을 만들 때 코끼리 해골의 화석이 발견된 장소에 기념 조각상을 만들었다.

전날 보지 못한 오웰라 박물관으로 갔다. 자연사와 문화, 인류학 국립박물관이다. 여직원이 박물관을 설명하는 작은 책자인 팸플릿을 주면서 “입장료는 없지만, 기부는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부자 기록부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박물관을 공짜로 볼 수는 없다. 보존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비용이 들 수밖에 없고 입장료로 메울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의 유적이든 모든 인류의 공동 유산이자 역사이기 때문에 나도 기부자에 동참했다.

오른쪽 첫 전시실에 들어가니 새들이 전시되어 잇다. 독수리와 올빼미, 바다 갈매기, 부리가 노랗고 아름다운 혼빌 새도 박제되어 유리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나의 눈을 끄는 것은  온 몸이 파란색과 녹색이 섞여 있는 새이다. 눈동자는 검은 색이지만 눈은 온통 노란색이다. 제비 같이 생겼으나 조금 크고 색깔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푸르다. 나미비아 뿐 아니라 보츠와나 등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바닷가와 숲속에서 많이 봤던 새이다. 이름을 몰라 여행 내내 궁금했었다. 전시실에 박제되어 있는 아름다운 자태도 나를 매혹시킨다. 팻말에 “버첼스 스탈링(Burchell's Starling)”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다. 아프리카 푸른 찌르레기라고 해야 할까.

나미비아 국립미술관 안의 '도착'(왼쪽)과 '출발'(오른쪽)이라는 제목의 그림 두점
 나미비아 국립미술관 안의 '도착'(왼쪽)과 '출발'(오른쪽)이라는 제목의 그림 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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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코뿔소의 짝짓기를 그림으로 그린 이유는

안쪽의 동물 전시관에는 치타와 검은 코뿔소, 악어 등 각종 동물이 박제되어 전시되어 있다. 박제 동물 사파리를 하는 느낌이다. 최대 멸종위기 동물로 검은 코뿔소(무소)를 별도의 공간에 전시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1960년대 10만 마리였던 검은 코뿔소는 1980년대 1만5000 마리로 줄어들고, 1989년에는 3400 마리로 급격히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검은 코뿔소의 생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풀 먹는 모습과 싸우는 모습, 심지어 오줌 누는 모습까지 생생히 사진으로 담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한 장면만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짝짓기 하는 모습인데, 사진 아래 설명에는 “짝짓기는 며칠간 계속 되는데, 그 장면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고 되어 있다. 설명대로 실제로 짝짓기 장면을 포착하기가 어려워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림으로 대체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박물관 직원에게 묻기도 그래서 그냥 웃으면서 지나갔다.

동물 전시관 옆의 문화 전시관에는 산족(부시맨)의 사냥 도구와 장면, 악기, 옷, 집 등 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장면은 산족의 밤 사냥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어두운 밤에 돌무덤 뒤에 숨어 있던 산족이 얼룩말이 다가오자 도끼를 들고 뒤에서 다가가 얼룩말의 오른쪽 뒷다리 무릎 관절부분을 내리쳐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얼룩말이 빠르니까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의 관절부분을 도끼로 찍어 내린다. 산족의 현명한 사냥수법을 보여준다.

또 다른 문화관은 세계 유목민 전시관이다. 엄밀히 말하면 북방 유목민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었다. 몽골 유목민의 이동식 전통가옥인 게르와 키르기스탄의 이동식 천막인 유르타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눈을 맞고 걸어가는 중앙아시아 낙타의 박제 모습과, 러시아와 핀란드의 겨울 유목인 생활, 특히 하얀 눈이 내린 설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겨울 유목민들의 생활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상영하고 있었다.

평생 눈을 볼 수 없는 보츠와나 열대 사막의 사람들에게는 북극 유목민의 겨울 생활이 신기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의 열대 유목민들은 유라시아 툰드라 초원의 한대 유목민의 겨울나기를 어떻게 바라볼까.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유목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겠지.

나미비아 국립미술관 안의 에이즈 그림 특별전시실
 나미비아 국립미술관 안의 에이즈 그림 특별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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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만 볼 수 있는 에이즈 경고 그림 전시실

박물관에서 나와 내려오는데 젊은이들이 수백 명 줄을 지어 서 있다. 나미비아 국립국장이다. 아마도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공연을 하는가보다. 그 아래 내가 가려는 국립미술관이 있었다. 많은 나미비아 현대작가들의 유화, 판화 등의 구상화와 추상화 등 그림과 사진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소재도 다양한데 역시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다.

2층 복도에는 똑같아 보이는 그림 2점이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어 관심을 끌었다. 다양한 색치로 그린 유화인데 자세히 보니 약간 내용이 다르다. 폴 키드(Paul Kidd)라는 작가의 2002년도 그림인데, 왼쪽 것은 작품이름이 “도착(Coming)”이고, 오른쪽 그림은 "출발(Going)"이다. 마차가 지나가면서 달라지는 시골 마을 풍경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마을 입구의 큰 나무도 마차가 마을에 도착할 때와 출발할 때에 따라 그 위치를 마을 입구와 마을 끝에 작가가 옮겨 놓아 ‘이동의 의미’를 그려내고 있었다.

지하 1층은 특별한 전시실이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그림이다.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HIV/AIDS) 특별전시실이다. 에이즈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취지로 만든 전시실이다. 에이즈는 개인 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공동체를 파괴되는 공공의 병이라는 위험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그림들이다. 나미비아는 다른 남부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에이즈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이 지난 2006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15~49세)의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는 남부 아프리카의 스와질란드로 19만 명(33.4%)에 이르고, 두 번째로 감염률이 높은 국가는 보츠와나로 24.1%, 뒤를 이어 레소토 23.2%, 짐바브웨 20.1%, 나미비아 19.6%, 남아공 18.8%다. 모두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나라다. 남부 아프리카에 유난히 콘돔 광고가 많은 것도 바로 에이즈 예방을 위한 홍보이다. 건전하지 못한 성생활 뿐 아니라 일부다처제 등의 영향으로 에이즈에 노출되어 있다.

한국이 생선 소비량 세계 9위라는 나미비아 신문

한참을 걸으니 다리가 피곤하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 있는 신문을 보니 <더 나미비안(The Namibian)>이라는 영자신문이다. 2006년 8월 10일자 신문의 3면 아래쪽에 ‘세계 톱 텐(10)’기록을 싣고 있었다. 매일 번갈아가면서 세계에서 10번째 안에 드는 기록을 싣는데, 독자들의 상식을 위한 면이다. 그날 신문에는 “생선 소비량 세계 10대 국가” 명단을 실었는데, 우리나라가 9위로 기록되어 있었다.

2002년도 통계를 인용해 민물고기를 제외한 바닷물고기만을 대상으로 한 1인당 평균 소비량(kg)을 기준으로 했다. 몰디브가 185.9,kg으로 1위이고, 사모아가 91,6kg으로 2위. 아이슬란드가 91.0kg으로 3위, 그리고 일본이 66.3kg으로 5위이고, 한국이 58.7kg으로 9위였다. 우리나라 생선소비량이 세계에서 9위라니.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선을 많이 먹는 사실을.

오후에는 산책을 했다. 빈트후크에는 시내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유명한 ‘호프마이어 산책길’이 있다. 전날 방문했던 알테 페스테 박물관의 뒤쪽 길인 휘겔 스트리트 거리를 따라 언덕길을 30여분 올라갔다. “호프마이어 산책길(Hofmeyer Hiking Trail)”이라는 팻말이 있다. 우리 남산과 같은 산책 코스인데, 포장된 길이 아니라 산속의 오솔길 그대로 이다. 운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멀리 교외의 언덕 위에 있는 집들도 예쁘다. 산새들도 많고, 다람쥐도 우리 다람쥐 보다 두 배 정도 크다. 도마뱀도 바위에 매달려 있다. 야생 알로에가 여기저기 솟아 있는데, 겨울이고 건기여서 꽃을 피우지는 않고 있었다. 빈트후크 시의 상징인 알로에 리토랄리스(Aloe Littoralis)다. 덤불 숲속에는 곳곳에 전망을 볼 수 있도록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빈트후크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내 중간에 있는 산이다 보니 한 바퀴를 돌다보면 빈트후크가 병풍처럼 펼쳐진 그림으로 다가온다.

낮인데도 아무도 걷는 사람이 없다. 치안이 약간 불안한 것이 흠이다. 산책길 입구에도 “강도를 조심하라”는 경찰의 경고팻말이 붙어 있다. 1시간 30분 걸친 산행이었다. 출발할 때와 반대편 쪽의 길로 내려오니 거리 이름도  “사랑의 길(러브 스트리트. Love St)”이다. 빈트후크를 동쪽으로 감싸고 있는 산도 ‘연애의 산(에로스 마운틴.Eros Mountains)’이다. 길 이름도 산 이름도 사랑스럽다. 정말 멋진 오후의 산책이었다.

호프마이어 산책길에서 내려다본 빈트후크 외곽 주택가 모습
 호프마이어 산책길에서 내려다본 빈트후크 외곽 주택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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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식민지배의 영향이 물씬 풍기는 빈트후크

이틀 동안 빈트후크 시내를 샅샅이 누볐다. 해발 1600m의 고원에다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빈트후크는 인구 24만 명의 아담한 수도이다. 도시 자체도 그리 크지 않지만, 여행의 마지막에 일정을 쫓기지 않고 걸어 다니다 보니 각가지 전경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지금도 머릿속에 도시 전체가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다. 빈트후크는 여행자 걷기의 도시다.

빈트후크 시내는 건물 뿐 아니라 거리에도 독일식 이름이 많다. 독일 식민지의 영향 때문이다. 호히란트 로드, 휘겔 스트리트, 욘 마이네르트 스트리트, 보이그트 스트리트, 구텐베르크 스트리트…. 내가 묵은 폰델호프 게스트하우스도 그렇다. 수도 이름인 빈트후크 뿐 아니라 스와콥문트(Swakopmund), 뤼데리츠(Rüderitz) 등 주요 도시 이름도 예외가 아니다.

국립미술관 등 빈트후크 공공건물에도 독일의 경제적 지원으로 건설됐다는 팻말을 자주 보게 된다. 외국인 단체 여행객의 절반 정도는 독일인이다.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의 독일인 여주인도 “빈트후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자랑한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과거 식민지였고, 지금도 독일식 건물들이 남아 있고, 독일식 이름도 많으니 향수가 느껴질 것이다.

영국 식민지인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등에 영국 여행객들이 많고, 벨기에 식민지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르완다와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에 프랑스 여행객들이 많은 이치와 같다. 식민지 종주국 여행객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국가가 대부분 종주국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어 여행하기가 편리하다. 마음속의 아련한 향수도 느낄 것이다. 나미비아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남아공의 신탁통치로 공식 언어는 영어이지만, 아프리칸스와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름들도 많다. 흑인들은 집에서 자신들의 부족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태그:#빈트후크, #나미비아, #기베온 운석,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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