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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치밀하고 치열하게 대처하였다. 일제는 조선근세사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독립혁명의 뿌리에 동학이 존재함을 꿰고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 무라타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25~30만 명을 학살한 것이나, 3.1혁명 당시 비무장 시위의 한국인 7.509명을 죽이고 15.961명의 부상, 피검자는 46.94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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