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는 일제에 대대적인 항거를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코자 은밀히 그리고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의 동조를 받아냈다. 1919년 3월 1일 거사가 예정되고, 천도교에서 15인, 기독교에서 16인, 불교에서 2인 등 33인의 민족대표가 선정되었다. 천도교 산하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 총독부 형사가 들이닥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천도교는 민족적인 거사를 앞두고 기금을 준비하였다. 자금이 없으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특히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타종교의 협력을 위해서는 적지않은 기금이 소요되었다. 그 역할은 춘암의 몫이었다. 이전부터 천도교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많은 돈을 지원하였다.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할 때 3만 원을 비롯하여 3·1혁명 준비과정에 기독교 측에 5천 원 등 독립운동 자금의 '뒷돈'의 상당부분이 천도교의 기금이었다.
천도교는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3·1혁명 전해인 1918년 4월 4일 부구총회(部區總會)에서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각 연원을 통해 매 교호(敎戶) 당 10원 이상 씩의 건축특성금을 10월 28일 교조 수운 최제우의 탄신기념일까지 모금했다. 모금이 시작되자 총독부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한성은행에 3만 원, 상업은행에 3만 원, 한일은행에 6천 6백 원 등 모두 6만 6천 6백 원의 예금을 동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많은 교인들은 논밭과 황소 등을 팔아 성금을 냈는데,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축성금을 되돌려 받은 것처럼 위장하기도 하고 성금액수를 10분의 1로 줄여 기장(記帳)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당 건축성금으로 약 1백만 원의 거액이 모아졌다. 그중 대교당과 중앙총부 청사 건축에 사용된 27만여 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성금이 3.1혁명을 비롯한 해외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총부는 남은 성금으로 이 해 가을에 경운동 88번지 일대의 대지 1,824평을 매입하여 12월 1일 교일기념일(현도기념일)에 중앙대교당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원로격인 권동진과 오세창은 1918년 12월 경부터 수 차례 서로 만나 세계 정세를 논하여 민족자결주의는 이제 세계적인 대세이며, 이미 폴란드는 국가부흥을 선언하였고 체코슬라바키아민족은 독립선언을 했고 그 밖에도 서양에서는 민족독립이 활발하게 창도되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 운동은 미국을 비롯하여 열강의 원조 또는 승인을 얻고 있으니, 지금이 조선독립을 쟁취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라 하고, 항상 신문통신기사 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8년 12월 하순 경부터 위의 두 사람은 천도교가 경영하고 있는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과 회합하여 의견을 말하고, 독립운동의 가부에 대해서 그의 의견을 구하였다.
최린 역시 이에 동의하고 그 실행방법으로 일본정부·귀족원·중의원·정당수령·조선총독에 대해서는 국권반환의 청원서를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해서는 항구적인 평화를 기초로 하는 신세계가 막 건설되려고 하는 오늘날 유독 조선은 이 은혜에서 빠지고, 일본의 압박정치하에 있다는 것을 호소하여 그 동정에 의해 국권부흥의 원조를 구하는 한편 조선인 여론의 환기에 힘쓰고 세계 여러 강국으로 하여금 조선 일반인의 의사표시를 인정케 함에는 단지 천도교만의 힘으로는 불가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교섭관계에서 보더라도 유력한 기독교 단체와 협력하고, 나아가 귀족 및 고로(古老)의 일부를 참여시킴으로써 소리를 높여 대대적 운동을 개시하면, 조선독립을 얻는 것이 반드시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고 믿었다.
또 이 운동으로 당장 성과를 거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치더라도, 조선독립의 기운을 촉진하는 데는 매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 하여, 이에 독립운동의 실행을 결의했다. 1919년 1월 25·26일 경 이들은 천도교주 손병희를 방문하여 이 계획을 지시한 바, 손병희는 신명을 다해 조국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하여, 이에 천도교의 방침은 정해졌다. 이것이 1919년 3.1혁명의 발단이다.
춘암은 거사 이후 천도교를 보호·유지해달라는 손병희의 뜻에 따라 33인 민족대표에서 제외되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에 의한 독립선언이 선포되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지 9년 만이다. 3.1만세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 곳곳으로 이어지고 해외의 한일사회에서도 일어났다.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두 달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발생 일별 통계표>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20일까지 20일간 매일 평균 12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3월 21일부터 4월 10일까지 20일간은 그 갑절인 매일 평균 25곳에서 일어났는데, 그중에서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4일간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3월 31일에 39곳, 4월 1일에 53곳, 2일에는 40곳, 3일에 39곳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같은 기간 전국 집회 횟수는 1,542회, 참여자 2,051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850명, 피체된 사람 46, 306명이다. (주석 1)
각 지역의 만세시위에는 동학 - 천도교인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기독교인들도 많이 참여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당일 즉시 일경에 끌려가 남산 왜성대의 경무총감부에 구금되고, 이날 밤부터 개별적으로 혹독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민족대표 외에 3·1혁명의 준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춘암 등 관련자들도 속속 구속되어 48명이 주동자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았다.
천도교에서 민족대표로 15인을 선정할 때 춘암은 살아남아서 천도교의 법통과 교통을 지키라는 손병희의 뜻이 담겼다. 이것은 동학 1세 교조 최제우가 처형을 앞두고 해월을 위기가 닥치니 멀리 피신하라는 정신과 이어진다.
주석
1> 김삼웅, <3.1혁명과 임시정부>, 69쪽, 두레, 201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