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노렸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닥치는대로 동학군을 학살하였다. 조정의 진압 요청이나 국제법상의 근거도 없이 불법적인 파병이었다.
박인호와 북접 동학군은 최시형의 총동원령을 통해 9월 18일에 봉기했다. 정부와 일본군은 10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동학토벌작전을 실시하였고, 가장 먼저 예포의 거점인 목소(木巢)리의 동학도소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박인호와 박희인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으나, 이후 10월 15일 4명의 두령급 접주를 대동하고 태안으로 가서 20일경 태안군 동면 역촌리에 동도대진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아산과 태안, 서산지역의 동학군들은 대공세를 펴기 위해 여미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이때 집결한 동학군의 수가 50만 명이었다. 이들의 첫 전투는 면천 승전곡이었다. 박인호는 출전에 앞서 "내 죽음이 곧 부모, 형제, 처자의 평안을 도모함이요 나아가 국가의 안녕을 기함이라"를 말로 동학군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박인호의 <갑오동학기병실담>에는 동학군이 승전곡전투에서 관군을 1시간 만에 대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석 1)
동학혁명군은 총체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소규모 지역부대 단위로 일본군 및 관군과 싸웠다. 지역의 동학책임자가 부대를 이끌었다. 면천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한 박인호의 동학군은 예산 신례원에서 다시 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여세를 몰아 박인호와 박희인이 이끄는 3만 명의 동학군은 10월 27일 덕산현을 점령하여 군기를 빼앗아 무장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처음에는 경성으로 진격할 생각이었으나, 후환을 없애기 위해 홍주의 관군세력을 전멸시킨 후 경성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홍주성 전투에서 동학군은 패배하였고, 2백여 명의 동학군이 죽임을 당했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로 희생된 동학군은 3만 명으로 북접에게 치명적이었다. 홍주에서 퇴각한 동학군은 11월 4일 해미로 향했고, 관군의 공격을 받아 40여 명이 사살되고 1백여 명이 체포됐다. 이 전투를 끝으로 충남 서부지역의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렸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북접은 관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활약은 북접의 탄탄한 조직기반과 더불어 박인호, 박희인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석 2)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은 비록 3개 연대의 8,000여 병력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잘 훈련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 조선정부군과 지방의 영병 또는 일본 대륙낭인들의 정보 지원을 받으면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상하였다.
동학혁명군이 소량의 화승총과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한데 비해 일본군은 영국에서 개발되어 수입한 스나이더(snider)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하여 임진왜란 때의 무기와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후발식 단발 소총으로서 1874년 일본의 대만 침략 때에도 사용되었던 신형무기였다. 동학혁명 당시 양측의 화력은 250 대 1의 수준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10월 9일(음력) 삼례집회 이후 10월 12일(음력)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이 본격화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15일(음력) 충청북도 청풍 부근에서 충주지방 경비병이 동학군 수령급 이하 30여 명을 살육하고 화승총 2000정과 화약 등을 약탈하였다. 10월 25일(음력)에는 대구 병참부의 일본군이 성주에서 동학군 11명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앞서 11월 12일 보병 제19대대가 서울에서 출발해서 동학군 학살전에 가담하였다.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3개 중대는 전병력을 3분하여 공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키 대위가 이끈 제1중대는 동로(東路)로 장호원을 경유하고, 모리오 대위의 제2중대는 서로(西路)로 진위를 경유하고, 이스쿠로 미츠마사 대위의 제3중대는 중로(中路)로 양지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
동학군 학살부대는 일본군 3개 중대가 주력을 이루고 기타 조선관군과 일본군이 양성한 조선 측 교도 중대, 그 밖의 일본군 수 개 중대와 대륙낭인들이 참가하였다. 동학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의 접전을 벌인 것은 우금치 전투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이 활동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동학도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점차 패퇴의 길로 빠져들었다. 북접 역시 남접과 같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세한 이래 남접 동학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공주 공방전에서 패전 후에도 전봉준의 부대와 고락을 같이 하며 후퇴하다가 순창에서 비로소 공동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를 향하여 북상하게 되었다.
이후 진안·장수·무주 등지를 우회하여 충청도의 영동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이 심하여 이곳에서도 지탱하지 못하고 청주 화양동을 거쳐 충주에 이르자 또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아 12월 24일을 기하여 잔여 부대를 해산하고 교조 해월 이하 손병희·손천민·김연국 등의 동학지도부는 각기 개별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3)
주석
1> 정을경, 앞의 책, 115쪽.(종합)
2> 앞의 책, 116쪽.(종합)
3> <천도교창건사> 제2편, 66~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