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암이 '멸왜기도'를 시도할 때는 이미 80이 넘은 고령이었다. 타고나기를 건강체질인 데다 생애를 온통 동학과 천도교의 맨 앞줄에서 활동하느라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이 무렵 일제는 조선농지령을 선포하면서 농민들을 더욱 옭죄고, 천도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옛 동지들 중에 변신자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린이다. 1932년 천도교 신파의 대도령(大道領)이 되고, 1933년 말 "현재의 국제정세하에서 동아시아의 민족은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하고, 특히 조선은 내선융합, 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유일한 길"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일제에 협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중국 항주에 있는 한국독립당에서 그에 대한 성토문을 내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는 중추원 참의가 되고 친일정치 단체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는 등 친일 행위에 광분하였다. 총독부는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반포, 항일운동으로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전향하지 않는 인사들을 예비검속하는 등 탄압이 날로 강화되었다. 이 무렵 천도교에 대한 감시·탄압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해졌다.
멸왜기도 사건으로 비록 병환이어서 구속은 면했으나 측근들이 구속되고 감시가 강화되면서 옴짝달싹하기 어려웠다. 심신이 함께 쇄약해졌다. 얼마 전에는 아들이 피살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런 중에도 문안오는 간부·신도들에게 '멸왜'가 머지 않았음을 전하고 희망을 안겨주었다.
비록 박인호가 최제우·최시형·손병희와 같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아닐지언정 그들의 카리스마를 일상화한, 즉 종교의 제도화를 완성하고, 제도에 따른 합리성에 기반한 지도력을 십분 발휘한 인물로 정의할 수 있다. 사실 해월부터 춘암까지는 직전의 카리스마 지도자들이 후계자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춘암 이후부터는 지목하는 형식이 아니라 지도자 승계 절차가 규칙과 규범에 따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착했다. 이는 천도교의 제도화 정도가 춘암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성숙해졌음을 알 수 있는 방증이다. (주석 1)
한 연구가는 그의 생애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동학 입도와 동학혁명에 참가한 1894년(40세) 까지의 초기, 제2기는 동학혁명 이후 교육문화운동자 교회법 제정과 3.1운동에 참가한 1919년(65세) 까지의 중기, 제3기는 6.10만세운동, 신간회활동, 멸왜기도운동을 펼치며 환원한 1940년(86세) 까지의 말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시기마다 어려운 과정이 뒤따랐지만 무주대도 수련의 힘, 공덕심을 강조한 사회윤리, 개방적인 소통의 자세, 생명을 살리는 타자 존중의 태도로 그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종단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3.1운동에 적극 가담 그 이후에도 멸왜기도운동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주석 2)
그는 종교의 지도자로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항상 공덕심(公德心)을 강조하였다.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민족의 쇠퇴를 막고 인류사회가 존속하기 위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도덕률이 있거늘 우리에게 가장 빈약한 것이 이 공덕심이다. 현재와 같이 광범위한 사회, 민족, 다시 국제적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더 한층 복잡한 사회에 있어서는 공덕심(公德心)이야말로 실로 중요한 생활 요소이다. 이조 5백년 간의 조선은 정치적으로 한 개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이상스럽게도 국가의 기초를 짓는 사회도덕에 대해서는 너무나 등한시하였다.
원래 조선에서는 가족주의가 발달되어 효를 중심으로 한 사덕(私德) 만은 최고로 진전되었으나 민족사회를 본위로 하는 공덕(功德)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못하였으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쇠퇴하는 가장 중대한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앞으로 한 개의 민족을 인류 사회에 그 존재를 지속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공덕의 보급과 실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 (주석 3)
점차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통하지 않던 시대에 그는 일제의 혹독한 압제 하에서 민족운동을 끈기 있게 계속하고 동지들의 배신과 내부의 분열 속에서도, 소수파의 리더로서 천도교를 이끌고 지켰다.
3.1혁명 이후 박인호는 분열되는 교단에서 일부 지도층의 일제 타협노선인 민족개조론, 실력양성론 그리고 자치론 등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랬기에 그는 교조이면서도 다수파인 신파에 동조하지 않고 소수파이지만 올바른 선택을 한 구파측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항일민족운동의 전위에서 묵묵하게 민족과 교단을 끝까지 수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박인호의 선택과 노선은 동학의 민족주의 이념이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진정한 민족주의로서의 역할을 이을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천도교가 민족종교로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준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주석 4)
주석
1> 박세준, 앞의 책, 100쪽.
2> 조극훈, 앞의 책, 165쪽.
3>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4> 임형진, 앞의 책, 22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