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3 12:29최종 업데이트 24.07.23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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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주인공 박동호(설경구 분)의 모습. ⓒ 넷플릭스


*이 글에는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이 화제다. 지금은 순위가 조금 하락했지만, 한동안 넷플릭스 국내 TOP10 1위에 머물렀다. 내용은 물론 화면 전개도 인기 미국 드라마처럼 거칠고 빠르다. 쉴 새 없이 새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문다. 시청자의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듯, 음악도 계속 두들기고 몰아친다. 정치드라마보다 정치 오락물 같은 느낌이다.


소위 '86세대'를 비롯해 현실 정치를 소재로 삼은 만큼 논란도 뜨겁다. 물론 이전에도 운동권 출신의 악역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곤 했지만, <돌풍>은 86세대 전체를 위선자로 다룬다. 정치인이 된 이들만이 아니라 노동운동에 남아 있던 이, 사업을 하는 이들 모두 속물이자 부패의 상징처럼 그린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도 하나같이 허접하다.

그렇다면, 누가 선이고 의인인가? 언뜻 보면 주인공 박동호다.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국무총리 자리에 오른 그는 사모펀드로 얽히고설킨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아 재벌과 결탁한 정치인과 맞서 싸운다. 이런 구도만 본다면, 법과 정치를 마음껏 농락한 기득권에 대한 저돌적인 싸움이 통쾌함을 줄만 하다. 그런데 <돌풍>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이 드라마에 의인은 없다.

박동호, 의인인가 독재자인가?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돌풍> 웹페이지에서는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로 이 드라마의 줄거리를 압축해서 소개한다. 주인공 박동호(설경구)는 죄지은 이들을 처벌하려 했지만 누명을 쓰게 되고, 함께 진상을 밝히려 했던 친구이자 국회의원 서기태(박경찬)도 누명을 쓴 채 자살한다. 궁지에 몰린 박동호는 부정의와 싸우고 세상을 뒤엎겠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정치 후견인이기도 한 현직 대통령을 살해한다.

사모펀드에 연루된 자식의 잘못을 덮으려는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요구하다 좌절하자, 아예 그를 살해해 버리는 주인공을 어떻게 봐야 할까? 드라마는 국무총리인 주인공이 세상을 뒤엎기 위한 딱 한 달의 시간을 벌기 위해 대통령을 살해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전형적인 '선악 구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박동호가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살해를 고백하고 약속한 한 달의 시간은 흘러가고, 이제는 스스로 최고 권력이 되려 한다. 그런데 그 방법도 고약하다.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상대 당의 당수와 은밀하게 결탁해 불법 선거인단을 동원한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도 음모, 협박, 거래, 기만 등 탈법과 위법을 가리지 않는다. 친구 서기태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수진(김희애)과 재벌 부회장 강상운(김영민)을 처단해 정의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이 모든 일을 자행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부정의 무게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놀라운 점은 '죄지은 이가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박동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정수진과 강상운을 응징하는 것에만 몰두할 뿐,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구조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 흔한 법률 하나 만들지 않고, 외려 자신이 당했던 공작과 조작, 제도적 허점을 마음껏 활용해 정적 공격에 나선다.

<돌풍>이 보여주는 독특한(?) 시선은 양심이나 정의감 따위는 박동호나 그 측근을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린다는 점이다. 박동호의 대통령 살해(사실은 의도하지 않게 미수에 그쳤지만) 사실이 알려진 후 일어난 시위와 저항도 '음모와 거래'의 결과로 다룬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온갖 부정·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 대통령이 되었다면,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러나 <돌풍>은 하야를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하는 노동자들의 시위 역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반씩 뒤섞은 듯한) 민국노총의 위원장이 자신에게 노후보장을 약속한 정수진과의 거래 때문에 일으킨 것처럼 그린다. 게다가 대통령 박동호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간첩단 사건까지 조작한다.

극 중에서 유일하게 양심과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된 박동호의 친구이자 검사인 이장석(전배수)도 약간의 갈등 뒤에는 사실상 대통령의 수사 지침에 따라 움직이며, 이에 항의하는 다른 검사의 행동도 정수진의 공작 때문으로만 치부한다. 게다가 이장석은 박동호의 죽음 뒤 "거짓을 이기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이라는 박동호의 신념(?)에 따라 결국 증거를 조작하고 불법 도·감청을 통해 정수진을 옭아맨다.

결국 <돌풍>은 '진실을 믿는 순진한 생각과 정당한 방법으로는 불의를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쏟아내고 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의 민주주의를 정지하는 것의 위험성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 넷플릭스

 
해석은 각자 다르겠지만, 박동호에게서 통쾌함보다 불안함이나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명분을 위해 치른 희생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돌풍>은 박동호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것이 정의라는 것에도 동의가 쉽지 않다. 사모펀드 부정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행한 암살, 불법 선거, 거짓과 기만, 매수와 협박, 거래와 조작의 무게는 그가 '부정의'로 규정한 것들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사실 박동호를 휘몰아치게 한 감정은 정의감보다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가깝다.

"나는 국민을 믿지 않는다"는 고백처럼, 자신 외에는 무엇도 정의로울 수 없다는 독선과 독단은 독재 권력의 초입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우리 역사의 독재 권력 중 박동호와 비슷한 명분을 내세우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던가? 극 중 박동호는 "불의한 자들의 지배를 견딜 수 없는 나를 위해" 이런 일들을 벌였다고 고백하지만, 그 '불의한 자'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음은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내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오늘의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고가 미화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적을 옭아매기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어떤 법적 처벌도 받지 않은 박동호의 성대한 장례식에서 '민주주의여 만세'로 끝나는 '타는 목마름으로'가 울려 퍼진 것은 또 하나의 기만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거나, 죄지은 자를 기가 막히게 선별해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역시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고 하자가 많은 현실의 민주주의는 박동호와 같은 독단적 신념이 파국으로 이끄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말만이 거짓을 이긴다는 박동호의 믿음이 지금의 참혹한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는 있어도, 현실의 민주주의를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따라 하지 마시라

박동호의 죽음 뒤, 그의 기대처럼 세상은 조금 더 깨끗해졌을까? 정수진과 강상운이 사라져도, 제2의 정수진과 강상운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박동호의 목표는 부패를 청산할 새로운 세상의 구조를 만드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수진과 강상운에 대한 응징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위선과 부패의 씨앗을 너무 많이 뿌려 놓았다.

거짓과 기만, 음모와 조작, 공작과 협박이 판을 치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그것을 활용했던 박동호의 유산은, 스스로를 선이라 믿고, 상대를 악이라 믿는 적대적 정치 구조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아 반복될 것이다. 권모술수가 정치 능력으로 칭송받고, 온갖 종류의 부정의를 스스로 만든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행태가 '박동호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박동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통쾌하게 실현한 의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외려,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독단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유린한 괴물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 정치에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같은 검사 출신으로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박동호를 보고 감정이입을 심하게 해 따라 할까 두렵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따라 하진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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