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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도올 김용옥의 강좌가 TV를 타고 유명세를 탔던 일이 있다. 그의 강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동양철학"이라는, 어떻게 보면 난해하고 재미없을 수 있는 분야가 그 정도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못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김용옥의 강의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나름대로의 재미를 겸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례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TV 라는 매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그의 강좌는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동양철학" 이라는 철학적 소재를 대중들에게 어색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름대로의 논리를 통해 정립되어나가야 할 학문의 체계가, 대중적인 기호와 감성에 따라 좌우되었던 사례는 결코 긍정할 수 만은 없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만일 수많은 학문들이 그 본연의 논리성을 상실하고 대중의 기호와 감수성에만 호소해야 한다면, 그리고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쇼맨십을 따로 키워야 한다면 그것 또한 거대한 비극이 될 것이다.
갑작스레 일어난 "동양철학"에 대한 붐, 그리고 이에 편승하고자 한 몇몇 인사들 쇼맨십, 이를 의도적으로 조장한 각종 매체들의 상술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지닌 거대한 힘과 구조적인 맥락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볼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는 TV 라는 매체가 지니는 거대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세계의 논리적 기반을 변질시키고 있는 TV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TV는 수많은 전문가의 세계가 지니는 자율성을 박탈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독점과 아집 그리고 이권에 의해 조장되어왔던 그들만의 세계를 공공의 영역으로 이끌어낸다는 면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은 그렇게 아둔한 이들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TV 라는 매체를 역이용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문가로서 지녀야 할 능력보다는 TV 앞에서의 쇼맨십이 더욱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게 될 수 있다.
학설의 우월성이 그 학설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논리, 합리성의 코드가 아닌 TV 앞에서 그 학설을 설명하는 학자의 외모와 억양, 말하기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법의 논리에 따라 형량을 판결해야 할 판사가, 언론 매체에 의한 영향력에 노출되게 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부조리와 위험은 결코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TV가 모든 것을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TV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TV 앞에서는 정당한 이도 부조리한 이가 될 수 있으며, 비합리적인 사람도 논리의 사도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TV앞에서의 코드는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브라운관을 다루는 그 사람의 스킬로 규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 매체가 보여주는 영상에 따라 우리는 반응하고, 그러한 반응은 다시 대중매체에 의해 포장되거나 혹은 이용되어 해당되는 집단에게 투영된다. 그들은 이로부터 구속되기 시작할 때 문제는 시작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TV가 나를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는 희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TV 가 변질시켜 버린 이러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특히 그는 TV가 선동의 도구가 될 때, 민주주의를 크게 위협하는 장치로 작용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급진전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정보 동원의 도구처럼 작동하는 미디어를 통해 이렇게 직접 민주주의의 도착적 형태가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미디어는 긴급하게 집단적 감정의 압력을 거리감없이 반영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장의 상대적 자율성의 논리에 의해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보복의 논리가 재형성되고, 이에 대항하여 모든 법적, 정치적 논리가 형성됩니다.
미국의 9.11 테러가 있었을 때, 미국의 모든 방송 매체는 일제히 이에 대한 "복수"를 노래했으며, 결국 그들의 복수는 "정당화"되었고, 이루어졌다. 놀랍게도 이러한 복수의 정당화의 코드가 된 것은 미국인들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의 평온한 일상과 안정적인 문화가 부각되었고, 이들의 평화를 깨뜨린 사악한 존재들에 대한 복수의 철퇴가 정당한 논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한다면 미국인이 아닌 이들의 안정적인 삶 또한 정당한 것이지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방송의 힘인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텔레비전의 세계는 프랑스의 것이지만, 그것은 한국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TV 의 한계 또한 우리가 인식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TV 의 화면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수많은 매커니즘에 의해 산출된, TV 가 보여주고자 하는 화면이라는 사실만큼은 주시해야 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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