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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1996년에 행한 두 편의 강의를 묶어낸 이 작은 책에서 부르디외가 말한 내용은 결코 작지만은 않다.

그것은 무척이나 크고 도발적인 내용이다. 크다는 말은 부르디외가 주로 ‘장’(場, champ) 개념을 통해 텔레비전, 나아가 저널리즘의 구조를 안팎에서 다룬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도발적이라는 말은 그가 “사실상 텔레비전이 다양한 메커니즘을 통하여 문화생산의 다양한 분야들(예술, 문학, 과학, 철학, 법)에 매우 큰 위험을 줄 수 있다고 생각”(11쪽)한다고, 나아가 “텔레비전은 정치적 삶과 민주주의에 큰 위험을 준다고까지 생각”(11)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런 강의가 텔레비전을 통해 녹화 방영되었다니! 

부르디외의 텔레비전론의 핵심은 장에 대한 분석이다. 장이란 “구조화된 사회 공간”(70)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안에서는 다양한 힘들이 서로 투쟁하는데, 텔레비전이 속해 있는 저널리즘의 장 역시 그런 장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저널리즘의 장 속에는 텔레비전을 비롯해 신문, 잡지 등 활자매체들이 있는데, 이 속에서 텔레비전의 권력은 이미 활자매체를 따라잡았다는 게 부르디외의 분석이다. 또, 저널리즘의 장 주변에는 예술, 문학, 철학 등의 개별 학문의 장이 있고, 그 외에도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등 수많은 장들이 존재한다.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저널리즘 장은 특히 시청률, 광고 등과 같은 경제적 장의 지배를 받으며, 그런 저널리즘 장이 학문의 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주목한다. 요컨대, 저널리즘 장이 학문적 장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저널리즘 장의 여러 메커니즘때문인데, 부르디외는 그런 예로 텔레비전의 속보 경쟁, 대중 추수주의, 통속성 등을 들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텔레비전을 지배하고 있고 그런 텔레비전이 저널리즘을 지배하고, 저널리즘이 지식인에 대한 ‘인정(認定)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 장의 본령인 저항적 성격이 저널리즘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장과 학문적 장 사이의 권력관계에 대한 부르디외의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할 방법이 딱히 없으나, 경험상으로는 수긍이 가는 얘기이긴 하다. 가령 최근 수년간 방송 강의를 거의 쉼 없이 해온 도올 선생의 경우가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예다. 그가 강의한 '노자'의 경우 그 해석 문제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격렬한 비판 혹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역시 최근 MBC에서 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강의에서도 한국사 시대구분의 문제를 놓고 그의 도발적 주장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도올이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핵심적 이유는 그의 노자 해석이나 한국사 해석의 문제가 도올의 공부 분야이기는 했으되, 동료 학자들에 의해 그의 ‘전공’ 분야로는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고, 동양학 전반에 대해 그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도올이 들으면 특유의 목소리로 화를 낼만한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유학과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들은 도올의 해석을 별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학과 한국사라는 개별 학문적 장 속에서 동료 학자들로부터 ‘전문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올은 텔레비전 공중파 방송이라는 저널리즘 장에서 폭발적인 시청률로 인정을 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도올의 말을 ‘진리’ 혹은 ‘정통’이라 받아들였을 테고, 그것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이 열을 받았던 것이다.

부르디외 역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소위 ‘학자-기자’ ‘철학자-기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저널리즘의 장 속에서 하는 이러저러한 얘기들이 사실은 학문적 장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도 저널리즘 장의 권력을 등에 없고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을 비판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저널리즘의 장의 한 속성은 ‘진리’와는 별 관계없는 시청률에 따른 선정성에 있기 때문에, 이런 ‘학자-기자’의 행태는 학문의 자율성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행동인 것이다. 물론, 이런 부르디외의 분석에는 엘리트주의니 지적 우월주의니 하는 비판들이 따를 수 있다.

부르디외 자신도 그런 비판을 의식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제 장의 영향력 하에 있는 저널리즘 장이 자율적 학문의 장을 흔드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런 점에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부르디외가 지적한 텔레비전의 여러 속성들 중 그것의 균질화, 통속화, 탈정치화 등은 우리의 상황과 관련해서도 특별히 강조할 만 하다.

그 주장의 핵심은 텔레비전들 간의 경쟁에서 기자들이 각기 다른 텔레비전들과 속보 경쟁을 하다보면 결국 서로 상대방의 뉴스를 특종으로 인정하지 않기 위해 비슷한 내용의 취재경쟁을 하게 되고, 그것이 곧 뉴스의 머릿기사가 다 똑같아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뉴스의 균질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내용이 아닌 사건, 사고, 환난 등 선정적인 내용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것은 곧 뉴스의 통속화를 낳게 된다. 이렇듯 “매우 보잘것 없는 것을 위해 귀중한 몇 분을 사용한다면, 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사실상 매우 중요한 것이 (되)”는(28) 것이다. 이는 시청자들이 진짜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다른 요소들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게 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시청자들이 탈정치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내용을 담고, 이미 알고 잇는 것들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구조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한 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흔드는 혁명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예술가, 학자, 종교적 선지자, 그리고 가끔 드물게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들이 정신구조를 대상으로 하여, 보고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상징적 혁명들이 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마네의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와 고대라는 근본적인 대립구도, 즉 전통적 미술교육을 기반으로 한 구조를 전복시켰습니다. 만약 텔레비전과 같이 강력한 도구가 이 같은 상징적 혁명을 향해 그토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저는 우리가 서둘러 이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게 아무도 이런 요구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단지 경쟁의 논리와 제가 언급한 메커니즘에 의하여 텔레비전은 그 같은 역할을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텔레비전은 공중(公衆)의 정신구조에 완전히 꼭 맞추어져 있습니다. (78-79)

가령, ‘감동을 주는 오락프로그램’으로 명성이 높은 MBC의 <느낌표>의 꼭지들은 얼핏 보면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실천들로 보이지만, 결코 “구조를 전복”시키는 “상징적 혁명”이 되지는 못한다.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가족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시청자의 눈시울을 적시지만, 딱 거기까지에 그침으로써 이주 노동자들을 귀국시키려는 정부 정책의 밖에 있는 수많은 다른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는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집을 예쁘게 개조해주고는 있지만, 부유층이 서너 채씩의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빈층이 그런 허름한 집에서 살거나 아예 집이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라는 사실들은 결코 변화시키지 못한다. 0교시를 받기 위해 나온 고등학생들에게 아침밥을 해 주면서 0교시 폐지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고등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아침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 시스템과 기업의 채용 시스템에 있다는 전복적 주장은 절대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텔레비전에 의한 ‘계몽’의 한계이자 ‘개혁’의 한계이고, 부르디외는 이럴 수밖에 없는 저널리즘 장의 속성을 얘기하면서 텔레비전같은 “강력한 도구”가 상징적 혁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 자신, 구체적인 대안이나 ‘로드 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언제나 거실 한 가운데 차지하고, 어느 때부턴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텔레비전. 이 텔레비전의 여러 프로그램과 그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말들, 수많은 담론들이 ‘당연하다’거나 ‘맞다’고 여겨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브레히트가 연극에서의 감정이입을 없애고 관객이 주체적으로 연극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을 원하면서 ‘소외효과’를 역설했듯, 부르디외는 우리가 감정이입해 오고 있는 텔레비전을 ‘소외’시키려 노력한다.

텔레비전은 또 하나의 권력이고, 그 권력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다른 큰 구조의 지배력 아래 있다.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프로그램들과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거나 그것들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우리가 텔레비전에 종속되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꺼버릴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의 작동 메카니즘을 제대로 알면서 봐야 할 것이다. 좀 더 나아가 텔레비전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조 개입에 힘쓰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비판적 자세는 텔레비전 뿐 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보는 기본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텔레비전에 대하여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동문선(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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