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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와의 교섭 진행에 따라 왕궁 뒤편 언덕에 진을 치기 위해 왕궁을 따라 진격하고 있을 때, 왕궁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다수의 조선 병사가 일본군을 향해 발포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수비하기로 하였으며, 일본 정부에게 침략의도가 없다는 뜻을 보증했다."

이 글을 1894년 일본의 조선왕궁 점령사건 당시 주한일본공사인 오토리 공사가 보낸 공식전문으로 이 사건에 대한 일본의 공식 견해이다. 과연 그럴까?

'일청전사' 초안에 있는 조선왕궁점령의 실상

"청국과의 '개전 명분'을 손에 넣고, 나아가 서울에 있는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일본군이 남쪽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는 동안 서울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시에 군수품 수송과 징발 등의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시행하는 편의를 얻는다는 목적 아래 계획된 것이다."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가 일본의 '사토문고'에서 찾아낸 <일청전사> 초안에 들어 있는 '조선왕궁점령의 실상'에 관한 내용을 요약한 것에 따르면 그 실상이 알려진 것과는 판이하다.

1894년 7월23일 이른 아침,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소위 조선왕궁 점령사건. 청일전쟁(1894~1895년) 개전(7월25일) 이틀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일본 근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나 청일전쟁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부분 가운데서도 부분으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인 나카츠라 아키라 교수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번에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 그의 책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박맹수 옮김 푸른역사 펴냄)를 보면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우리의 상식을 훨씬 능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일본이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세계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던 청일전쟁 최초의 무력행사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내외 공언과는 달리 그 조선의 왕궁을 점령했다는 점, 청일 전쟁 개전에 대한 대의명분 마련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이 사건에 대해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왜곡하여 내외에 알렸다는 사실에 비추어 일본의 고질병(역사를 위조하는 것)을 해명하는 열쇠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치밀한 준비로 이루어진 청일전쟁의 첫 무력실험

"청일전쟁은 일본이 치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고, 그 첫 실험이 조선 경복궁 점령이었다. 역사 위조는 대국을 꿈꾸는 일본의 뿌리 깊은 전통이다."

나카츠라 교수가 명쾌하게 내린 결론이다.

한일관계사 연구에 천착해온 지한파(知韓派)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해 철저히 그 책임을 추궁해온 일본의 양심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그는 "위대한 '메이지 영광'을 되살"리려는 시바 료타로로 대표되는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이 현재진행형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이 '위대한 메이지'에 대한 환상이 바로 근대일본에서 이루어진 조직적인 '역사 위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을 애매하게 조작하는 역사 위조가 일상화되고 이렇게 조작된 사실이 학교 교육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국민적 상식'으로 통하면서 일본군이 "청일, 러일 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키는 모범적인 군대"였다는 환상까지 갖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해서 그는 청일,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중국과 러시아에 지배당했을 것이라는 허구적 사고 속에서 일본의 야망은 점점 커졌고, 조선 침략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태평양 섬들로까지 전쟁을 확대시킨 결과 참담한 희생과 비극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덧붙이는 글 | 나카츠카 아키라 / 푸른역사 / 248쪽 / 10,000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푸른역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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