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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북단 양사면 일대에서는 하루 24시간 북의 대남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북은 예전과 달리 정치선전이나 혁명가요가 아닌 괴상한 기계음을 내보내고 있다.
 강화도 북단 양사면 일대에서는 하루 24시간 북의 대남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북은 예전과 달리 정치선전이나 혁명가요가 아닌 괴상한 기계음을 내보내고 있다.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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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단체의 대북 전단에 맞대응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북한은 올해 5월부터 지금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오물 풍선' , '쓰레기 풍선'을 날려 보냈다. 며칠 전에는 풍선 기폭장치(발열 타이머로 추정)로 인해 파주의 한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풍선 폭탄'이다. 차라리 첨예한 정치적 구호가 적힌 '삐라'가 온건하게 느껴진다. 휴전 중인 남북이 치열한 심리전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며, 남쪽의 시민들은 공포 영화를 넘어 괴기 영화를 관람하는 섬뜩하고도 요상한기분이 든다.

강화도 북쪽 해안가에 울리는 괴이한 대남 확성기 소리

쓰레기 풍선만이 아니다. 지난 6월부터 남쪽에서 대북 방송을 재개하자, 북은 대남 확성기를 통해 괴이한 기계음 소리를 발사하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다. 강화도 북단 해안 철책 근방에 거주하는 나도 이 소리를 수시로 듣고 있다. 한강 하구 건너 북녘 산하가 눈 앞에 보이는 그 어느 곳보다 현실적인 공간에서 듣는 초현실적인 소리였다. 공포 영화의 배경음악을 연상시키는 소음을 하루 24시간 내보내고 있는데, 평화전망대가 있는 강화 양사면 쪽에서는 매우 크게 들리고, 그 옆의 송해면에서도 뚜렷하게 전해진다. 양사면 해안가에 사는 지역 주민은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느낄 정도이다. 교동도 주민도 마찬가지라 한다.

필자는 1980년대 초반 강원도 동부전선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가끔 비무장지대(DMZ) 안으로 심야 매복 근무를 나갔고, 주간에는 민통선 이북 지역에서 삐라 수거 작업을 했다. 그때 당시 남북의 철책 안 DMZ 안에서 드러누워 듣던 북의 혁명가요와 남의 유행가(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기억난다)는 귀에 익숙해지니 백색 소음 정도였고, 가끔 수거하던 북의 삐라와 남쪽의 전단(비키니 수영복 입은 여배우 사진이 주를 이뤘다)은 지금의 '쓰레기 풍선'과 쓰레기 소음 방송에 비하면 순진한 장난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 강화도에서 들리는 대남 확성기 소리
ⓒ 이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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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에서 들리는 대남 확성기 소리
ⓒ 이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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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곳에서 들은 대남확성기 소리 강화도 해안 철책 주변에서 들리는 대남확성기 소리. 소리가 기이하고 특이한 데다 어떨 때는 귀신 소리 같기도 하다.
ⓒ 제보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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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한 소설 <분지>와 초현실적 상황

도대체 북은 왜 남쪽을 향해 혁명 구호를 적은 삐라나 혁명가요 대신에 생활 쓰레기와 괴이한 느낌을 야기하는 기계음을 보내는 걸까. 그것이 어떤 고도의 초현실적 심리전인지는 모르겠으나 엊그제 해안 철책 부근에서 처음으로 대남 확성기 소리를 직접 들으며 '그로테스크'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을 연상하게 된 것은 최근에 남정현(1933~2020) 소설가의 <분지>(1965)를 다시 탐독하고, 그에 관한 평론을 읽는 중에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접했기 때문이다.

장현은 논문 <1960년대 한국 소설의 탈식민적 양상 연구--이호철, 최인훈, 남정현의 소설을 중심으로>(2005년 8월, 가톨릭대 국문과 박사 논문)에서 "그로테스크한 면모는 <경고구역>에서부터 <허허선생> 연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나는 남정현 특유의 수사 장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기법들은 "남정현 문학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라고 썼다.

남정현 소설에서 풍자를 위한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그로테스크를 들 수 있다. 풍자소설의 여러 특성 중 유독 남정현 소설에서 엿보이는 그로테스크는 환상과 유사하게 이해되기도 한다. "환상은 등치적 리얼리티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그로테스크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로테스크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작품과 반응 속에서의 해결 안 된 충돌'이며 '양면성이 공존하는 비정상)으로, 환상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래서 남정현의 소설은 "환상적이란 말보다 실은 좀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린다. 한쪽에서는 '웃음'이, 다른 한쪽에서는 '공포와 혐오감'이라는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반응의 충돌이 남정현 소설에 흔하게 나타나므로 그로테스크 기법을 남정현 문학의 한 요소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혼란한 세계를 표현하는 그로테스크는 모순과 갈등의 원리로서 이질적이고 모순된 요소들을 포괄한다.

장현은 "남정현 소설에 보이는 그로테스크는 극단적인 과장이나 왜곡의 수단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는 부정적 현실의 실상을 정확하게 포착하며 이를 희극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남정현의 대표작 <분지>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에 가깝다"라고 평했다. 장현은 "예술과 문학에 있어 그로테스크한 양식이 특별히 투쟁과 격변으로 점철된 혼란한 사회와 시대에서 득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격동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창작 활동에 임한 남정현의 작품 세계에서 그 본보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도 개풍군 산에 북한의 대남 확성기로 보이는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2024.6.11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도 개풍군 산에 북한의 대남 확성기로 보이는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2024.6.11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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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저 소리가 그로테스크구나!

논문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일상적이지 않은 '그로테스크'라는 말의 어원과 의미에 관해 찾아서 읽어보았다. 그로테스크라는 용어는 "로마 황제 타이터스의 목욕탕으로 가는 지하 통로와 네로의 황금 궁전의 폐허 속에 있던 이상한 이미지들의 발견에서 시초했다(……) 다양한 신화적 형상들이 혼합되어 있었고, 동물의 몸과 새들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 그리고 인간의 형상들이 이와 뒤섞여 있었다(……) 그것들은 불합리한 형상을 통해 낯설음을 느끼게 했고 보는 이에게 매혹, 놀라움, 불편함, 공포의 감정을 주는 이질적이고 부조리한 것이었다(백훈기, <그로테스크의 연극 미학 연구 –모방(mimesis) 개념을 중심으로>, 2006, 재인용)"라고 한다. 막연하게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그게 어떤 느낌이지?'라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강화도 송해면 해안 철책선 주변에 있는 강화천도공원을 산책하다 대남 확성기 소리를 듣는 순간 섬뜩한 느낌과 함께 '아, 바로 저 소리가 그로테스크구나'라고 몸으로 절감하게 됐다.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사이렌 소리와 음산한 겨울바람 소리 그리고 간혹 꽹가리나 철판 두들기는 소리와 귀신 소리가 뒤섞인 소음이었는데, 공포감보다는 두통과 구토를 유발하는 역겨운 소리였다.

휴전 중인 남북의 철책선 너머로 들려오는 그로테스크한 기계음이 지극히 정치적이듯이 남정현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도 비현실적인 상상이나 초현실적 환상에 가깝다기보다는 정치적인 현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분지>와 남정현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연작소설 <허허선생>도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많다. 장현은 <남정현 연작소설 '허허선생'의 그로테스크 변모 양상>(2012)이라는 논문도 썼는데, "<허허선생>은 세대와 외세 문제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연작 소설"이라 평한 그는 "포악과 공포의 도가니에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는 미학적 범주로 그로테스크를 활용하였다는 것, 이것이 곧 <허허선생>의 문학적 본질이라 할 수 있다"라는 말로 글을 끝맺었다.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

 인천 강화군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해안 철책 인근에서 주민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2020.9.28
 인천 강화군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해안 철책 인근에서 주민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2020.9.28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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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한 괴음을 내뿜는 대남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남정현 소설 <부주선상서>(1964)에 나오는 말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이란 구절이 떠올랐다. <부주선상서>는 부인을 살해한 죄로 창경원 동물원에 갇힌 용달(龍達)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 용달은 "아버지, 도대체 소설이란 무엇입니까. 한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물이 아니겠습니까. 픽션. 그리하여 재미가 난다는 거겠지요. 그런데 한 인간의 상상력을 가지고는 도저히 추정할 수 없는, 그렇게 기이하고도 엉뚱한 일들이 출몰하는 이 땅의 현실과 충돌했을 때 저는 당황했습니다"라고 아버지에게 항변한다. 이어서 나오는 말이다.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
이것이 곧 카오스의 세계요. 또한 이 땅의 생생한 리얼리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젠 분명히 현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 대치되어 버린 그러한 토지 위에서 우리들은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단 80년을 눈 앞에 둔 나라에서 사는 우리 또한 그런 것 아닌가. 고조선,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던 백의민족의 나라가 이제 좌우로 치우친 머리가 두 개, 심장도 붉은색 파란색 피가 흐르는 두 개의 심장을 지닌 괴이한 생명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픽션을 제압한 그로테스크한 분단 현실 앞에 민초(民草)는 맥을 못 추고 있는 모양새다.

#강화도#대남확성기#남정현#분지#쓰레기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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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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