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가(大家)의 손길이 느껴지는 관록이 베겨있는 글을 읽는 것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도구삼아 가려져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글을 읽는 것. 이 둘은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여기에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섬세한 통찰과 감수성이 가미된 글이라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잔 손택이 써 내려간 <타인의 고통>은 바로 이런 글이다. 그녀가 언급한 전쟁과 고통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그 비극적 슬픔이 너무 커 보인다. 하지만 날카로운 그녀의 통찰력은 전쟁과 고통을 너무 무겁지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묘사해 나간다.
<타인의 고통>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엔 많은 고통이 존재한다. 이러한 고통의 크기와 본질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고,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도 없기에 그들의 고통을 너무나 쉽게 말해버리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없이 이용한다.
인류 역사 이래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고통을 주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일 것이다. 수잔 손택은 전쟁으로 발생한 사람들의 고통에 관하여 눈을 돌리고 있다.
20세기 이후 전쟁이 주는 고통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진이 한 몫 했다. 또, 사진작가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담긴 의미와 그 안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을 수잔 손택은 이야기해 나간다.
전쟁의 참상을 외부로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사진이다. 그렇다면,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 수잔 손택은 영국의 여류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견해에 주목한다. 그녀에 따르면 사진이란 "논쟁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실의 조잡한 진술일 뿐"이지만 사실상 사진은 "그저" 그 무엇일 뿐인 것이 아니며, 울프나 그밖에 어떤 사람일지라도 사진을 일종의 사실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울프도 곧바로 덧붙였듯이 "눈은 뇌와, 뇌는 신경 체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신경 체계는 과거 경험과 현재 느낌을 모두 통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빠른 재주를 갖춘 덕택에 사진은 객관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잔 손택에 의하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인데 이는 사진작가가 주관에 따라 보여주고 싶은 부분을 편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집이라는 것은 작가의 주관이 이미 들어간 것이고, 이는 가장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그렇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작가가 구도 잡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작가의 의도 안에서 그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는 충분히 권력에 이용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다. 수잔 손택에 의하면, 이러한 사진의 기능은 오랫동안 뛰어난 문학이 그처럼 되기를 갈망했으나, 문학적인 의미에서 결코 성취해 내지 못했던 그런 경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다발적으로 셀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참혹함과 고통을 주는 전쟁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둘러싼 국가 간 충돌이라는 것인데, 이는 양파 껍데기처럼 싸이고 싸여 있는 유치한 전쟁논리를 들추어내면 나오는 마지막 본성일 것이다.
20세기 이후부터는 여기에 (전쟁터) 사진작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전사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긍정적 이미지 또는 전쟁을 개시하거나 전투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이미지를 제공해 왔는데 전쟁사진 역시 정부가 전쟁시(詩)처럼 병사들의 희생을 독려하는 기능을 할 뿐더러 전쟁 사진은 그러한 사명, 그러한 불명예를 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수잔 손택은 가감없이 들추어낸다.
어떤 말로 포장하고 미화하건, 전쟁이란 것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그리고 주목을 끄는) 소식이었고, 현대 사회에서 국제 스포츠 경기를 제외하고 견줄 만한 쟁점이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 그 저변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전쟁 사진이 던지는 이중성으로 인해 숨겨 있는 진실이다.
사실, 이런 사진이 보내는 신호는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작가들이 보내오는 전쟁사진을 보면서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장관인가!"하고 외치기도 하는 것이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다중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스펙타클의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며, 홍수처럼 쏟아지는 매체가 주는 지나친 자극으로 무감각에 빠져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또, 이렇게 다중적인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실제기도 하다.
제프 윌이 찍은 '죽은 군대는 말한다'(매복뒤의 소련 정찰군 모습. 1986년 겨울 아프가니스탄의 모코르 근처)라는 사진에 대한 수잔 손택의 감상은 과연 <타인의 고통>이란 것에 감상적인 과장 없이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진속의 죽은 병사들은 놀랄 만큼 살아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자신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에게 말이다. 그렇지만 왜 그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꼭 들려줘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해준다 해도) "우리,"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전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에 포화 속에 갇혔으나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그렇다. 수잔 손택의 이 마지막 말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수잔 손택은 이 책을 통하여 전쟁과 사진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를 발견해 내었다.
독서하는 동안, 그녀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했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깔끔한 문체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더불어, 고통이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대기업을 경영하는 재벌조차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굳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고통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엔 고통이 가득하다. 반면, 우리는 여러 고통의 산물을 그 의미도 모른 채 누리며 살아간다. 모니터를 손보는 어느 여공의 고통도 모르고, 핸드폰 뚜껑을 조립하는 어떤 아줌마의 고통도 모르며, 내 비싼 신발을 만들어준 인도네시아의 어느 청년의 고통도 모른다. 고통이 만연한 세상 안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채, 모두 그것을 에너지 삼아 살아가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