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때였다. 점심시간에 같이 도시락을 먹던 친구 한 명이 전날 엄마한테 들었다며 호남사람은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던 게. 호남사람은 다 거짓말쟁이고 꼭 뒤통수를 치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무심코 듣다 먹던 밥이 갑자기 목구멍에 걸리는 줄 알았었다. 바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사춘기의 칼 같은 자존심으로 내색하지 않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이 울었었다. 사실 5살 때 서울로 올라와 유치원부터 서울서 다녔고 시골은 명절 때나 한 번 갈까 말까 한 곳이었기에 내게 시골은 낯선 곳이었다. 물론 내가 호남사람이라는 의식 또한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친구의 그 말은 충격이었다.
그 후 난 대학 졸업 때까지 누구에게도 우리 부모님이 호남사람임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누가 알까 두려웠었다. 그건 내게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읽고 어느 정도 의식화가 된 후에도 그 사실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다.
그토록 단단한 껍질 속에 존재했던 사실이 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였다. 그 책을 읽고 난 전라도인이 평균의 한국인보다 특별히 사악했던 게 아니라 교묘한 유언비어와 그에 준하는 비열한 정치적 책동 안에서 만들어진 편견의 희생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눈앞이 훤히 밝아지며 오랜 세월 나를 조였던 밧줄이 풀어지는 해방감을 그 책을 덮으며 느꼈었다. 내가 알기로 강준만은 호남에 대한 차별적 의식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밝힌 최초의 지식인이다. 그 후로도 내 부모님이 전라도 사람이고 내가 태어난 곳이 전라도라는 사실을 말하기까지는 몇 년이 더 필요했지만 적어도 내 맘으로 내 고향은 더 이상 부끄러운 곳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강준만씨 책을 열심히 읽었었다. <노무현 죽이기>를 마지막으로 난 그에게서 멀어졌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고부터 나의 정치적 관심은 급격히 사라졌다. 두 번에 걸친 민주 정부의 탄생을 본 것으로 신문 정치면은 내 관심 밖으로 멀어졌고 생활에 치여 몇 년이 흘렀다. 작년부터 난 정치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치솟는 강남의 집값이었는데 그 후 주의 깊게 보니 이 정부가 그때 그 사람들이 맞는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러다 이번 추석 때 우연히 강준만의 <고독한 한국인>을 읽었다. 다소 거칠지만 직설적인 문장, 가끔 지루함이 들기도 하지만 행간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의 글을 다시 읽었다. 분명 강준만씨도 나이가 들었을 텐데 그의 글은 여전했다.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이 정부에 대해 막연히 느꼈던 불만,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열린 우리당의 민주당 분당, 자기 자식은 모조리 외국에 보내놓고 한국의 교육을 말하던 사대 교수들에 대한 냉소….
내 안에 있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성찰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해야 할 일이 산 같은 추석이었지만 한나절만에 다 읽고 다시 동네 서점에가 강준만씨 책을 몇 권 사들고 왔다. 내가 잊고 있던 몇 년 동안 그가 쓴 책은 상당히 많았다. 다 읽으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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