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운동'으로 유명한 옥천의 추모 열기는 차분하면서도 비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인 26일 저녁 8시 분향소가 차려진 관성회관 야외공연장에 어둠이 깔리자 조문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낮에 비해 꾸준히 늘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옥천 주민들의 마음을 담은 국화가 향꽂이 옆에 차곡차곡 쌓였다.
향 연기가 피어올라 사그라지는 곳에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분향단 왼편에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이 하얀 천 위에 돌아갔다. 민주당 김서용 보은옥천영동 지역위원장과 조만희(청산중 교사), 김성장(옥천민예총 전 대표)씨 등 옥천 노사모 회원들이 상주가 되어 조문객들을 맞았다.
9시쯤 한 주민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노래 공연을 했다. 기타를 치며 노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텔레비전 광고 음악으로 쓰인 '상록수'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불렀다. 분향소는 잠시 음악 공연장이 됐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노래가 흐르자 50여 명의 주민들은 스탠드에 앉아 야외공연장 무대에 마련된 분향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름 밝히기를 꺼려한 한 중년 여성은 "노 전 대통령이 참 안됐다"며 "가족들과 조문하러 왔지만 나는 붉은색 옷을 입어 절을 할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지난 2000년 옥천 주민 33인은 관성회관의 정지용 시인의 흉상 앞에서 '조선일보바로보기옥천시민모임'(옥천 물총)출범식을 갖고 조선일보 구독거부운동을 펴나갔다. 1998년 <월간조선>의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으로 촉발된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역 차원에서 구현된 것이다. 불과 2년 만에 조선일보 판매부수가 지역신문인 옥천신문을 밑돌 만큼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2003년부터 매년 '언론문화제'를 개최한 옥천은 언론계에서는 '언론개혁'의 고장으로 알려졌다. 언론개혁에 집념을 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기에 옥천 주민들은 각별한 아쉬움을 보였다.
분향소를 취재하던 <옥천신문> 정창영 기자는 "노 전 대통령은 지역분권과 지역 언론 육성을 시도했던 분이었다"며 "이런 흐름을 앞으로 더 이어나가기 힘들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옥천군의회 박한범 의원도 "노 전 대통령은 사회 비주류의 선봉에 섰던 분이었다"며 "우리가 그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아닌가"라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옥천군에서 관성회관에 분향소를 마련하기 전인 24일에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옥천 농협 앞 광장에 분향소를 만들었다. 이 때 필요한 영정 사진, 화환, 초 등의 물품은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했다. 이후 군과 협의해 분향소를 지금의 관성회관 야외공연장으로 옮겼다. 분향소 마련을 주도했던 청산중학교 조만희 교사는 "분향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노 전 대통령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