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의 대표들이 한미FTA 폐기 의지를 담은 서한을 미국 대통령과 상하 양원 의장에게 발송한 것을 놓고 말들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를 겨냥해 무슨 '역심판론' 같은 것을 제기한 모양새다.
박 위원장은 "(야당이) 한미FTA가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조하고서는 이제 와서 정권이 바뀌면 없던 일로 하겠다는 데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서 "한미FTA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정치권의 행동이나 말은 책임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뒤질세라 이명박 대통령도 거들고 나섰다. 이 대통령은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한미FTA"라며 "세계가 경쟁하고 있고 모두가 다 미국과 FTA를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발효도 하기 전에 폐기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화 시대에, 과거 독재시대도 아니고 외국 대사관 앞에 찾아가서 문서를 전달하는 것은 국격을 매우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예의 저 '국격' 타령이다. 한미FTA에 관한 한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이 대통령 사이에 '찰떡공조'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국내법도 아닌 국제조약마저도 '날치기' 처리하는 것은 '국격'을 상승시키는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따져 물어야 할 일인지 도무지 우리로선 알 턱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국격을 추락시킨 행위에 대해 대다수 국민 또한 끝까지 책임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대형마트 진입규제, 한미FTA 충돌 없다"... 과연?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새누리당이 내놓은 이른바 '골목상권 보호대책'이란 걸 보면 한마디로 그 어처구니 없음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13일 새누리당은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지방 중소도시 신규 진출을 5년간 금지하는 방안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 개정안을 추진키로 했다 한다. 이런 내용의 '중·소상공인 보호 대책'을 발표에 따르면, 신규진출이 금지되는 중소도시의 기준은 인구수로 30만 명 이하가 해당되는데, 이 같은 기준에 따르면 전국 82개 도시 가운데 50개와 전체 군(郡)이 대상이 될 전망이다.
새누리당은 또 이미 중소도시에 진입한 대형유통사에 대해서는 최근 도입된 '심야 영업(오전 0~8시) 제한조치' 적용에 이어 지방자치단체 결정에 따라 월 최대 4일까지 강제휴무일을 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김종인 비대위원은 "이번 조치가 자유무역협정(FTA)에 저촉할 수 있다는 논란이 나올 수 있는데 외국기업, 국내기업에 균형하게 규제를 가하는 것인 데다 외국업체가 국내의 30만 명 미만인 도시까지 진출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내외국민 간에 차별을 금지한 '내국민대우' 조항(한미FTA 제12.2조)만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미FTA 제12.4조 '시장접근'을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제12.4조 시장접근어떠한 당사국도 지역적 소구분에 기초하거나 자국의 전 영역에 기초하여 다음의 조치를 채택하거나 유지할 수 없다.가. 다음에 대한 제한을 부과하는 것1) 수량쿼터, 독점, 배타적 서비스 공급자 또는 경제적 수요심사 요건의 형태인지에 관계없이, 서비스 공급자의 수 2) 수량쿼터 또는 경제적 수요심사 요건의 형태로, 서비스 거래 또는 자산의 총액3) 쿼터 또는 경제적 수요심사 요건의 형태로, 지정된 숫자 단위로 표시된 서비스 영업의 총 수 또는 서비스의 총 산출량전국 50개 시와 모든 군을 ISD 구덩이로 몰아넣는 짓한미FTA 제12.4조에 따르면 한미양국은 전국 또는 그 '지역적 소구분'(regional subdivision) 곧 전국의 시·군·구 등과 같은 하위 단위 어디서건 '서비스 공급자의 수'에 제한을 부과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시장접근과 관련된 의무(제12.4조)'는 '내국민대우(제12.2조)', '최혜국대우(제12.3조)', '현지주재(제12.5조)'와 더불어 협정문 제12장 서비스무역상의 '4대 기본의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구수 30만을 기준으로 전국의 중소도시 50개와 모든 군에 외국 유통업체의 시장접근을 제한하는 것은 협정문 '제12.4조 가항 1)호'에 상충될 소지가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대형마트 심야영업 제한 조치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이 검토하고 있는 월 최대 4일까지의 강제휴무일제 역시 '제12.4조 가항 3)호'상의 '서비스 영업의 총수' 제한 금지 조항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소도시에 진입하기 위해 투자 의향을 밝힌 미국의 어떤 유통업체가 새누리당의 유통법 개정안을 협정의무 위반으로 투자자-정부 중재제도(ISD)에 의거 세계은행에 제소할 가능성도 당연히 높다.
말하자면 이 개정안으로 인해 전국 82개 시 가운데 50개, 그리고 전국 모든 군이 ISD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새누리당은 날치기할 땐 언제고 이제 총선을 앞두고 표가 아쉬우니 전국의 수많은 시·군을 ISD 구덩이로 몰아넣는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유통법 개정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시행 중인 유통법상의 전통상업보존구역제도에 따른 입점제한 제도, 상생법상의 사업조정제도 역시 한미FTA와 상충될 여지가 높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종 논란 끝에 시행중인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 역시 한미FTA와 상충된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데스크탑PC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데스크탑 컴퓨터시장에 진입이 불가하다. 그런데 지난해 말 새로이 정부조달시장에 뛰어든 미국의 델이나 IBM 데스크탑은 어떤가. 만일 이 회사들의 데스크탑의 정부조달 시장진입을 정부가 규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한국정부는 ISD 제소 대상이 될 것이다.
중소상인들의 '공적 1호'가 애국자로... 대체 뭔가
갑자기 중소유통상인이나 중소기업을 보호하겠다는 때늦은 자각은 비록 가상하나, 뭘 좀 제대로 알고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미FTA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가.
더군다나 새누리당의 졸속정책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애국자' 김종훈 전통상교섭본부장의 등장이다. 새누리당의 '애국자'인 그는 오래전부터 중소유통상인의 '공적 1호'였다.
중소유통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통상생법에 대해 국회 입법조사처, 지식경제위 전문위원실 등에서조차 WTO 협정 위배가 아니라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도 김종훈 전 본부장은 줄기차게 중소유통상인 보호법에 반대해서 이 법안들을 폐기 직전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우리 중소상인들의 밥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EU FTA 위반'을 이유로 들면서 오히려 영국 대형유통업체의 이익을 가장 앞장서서 옹호했던 이가 바로 이분이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새누리당, 날치기에 무임승차하다 불현듯 중소상인을 위한답시고 협정 위반이 자명함에도 유통법 개정안을 내놓더니, 또 다음 날엔 중소상인과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바로 그 한미FTA를 폐기하자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한다.
그러더니 바로 그 중소상인 보호를 위한 유통상생법 개정에 가장 반대했던 인물을 '애국자'로 둔갑시켜 선거용 매물로 내놓았다. 박근혜의 새누리당,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언가!
덧붙이는 글 | 이해영 기자는 현재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