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기대 없이, 남은 생을 살 수 있을까. 여름휴가철 읽을 만한 책을 고민해 보니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떠올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이며, 문장이 아름다워 읽은 뒤 여운이 오래가는 책이다. 137페이지 분량이어서 휴가철 부담 없이 읽기에도 좋다. 더불어 연애 감성을 자극하는 정서도 깃들어 있다.
돈과 스펙이 사람을 대변하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며 산다.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누군가가 과거의 사랑보다 아름답기를 바라며, 나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사랑해줄 반쪽을 학수고대하기도 한다.
이 책 <연인>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처럼 촉촉한 사랑이야기다. 더불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화끈하기도 하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경험'하기 이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책 <연인> 중에서.책은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 소설로, 이야기는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장소에서 시작된다.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 열다섯 살 반이 된 프랑스 소녀와 서른이 넘은 중국인 남자가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만난다. 남자가 말한다.
"당신은 너무나도 예뻐서 아무거나 다 어울리겠군요."첫 눈에 상대방에게서 '욕망을 충동질하는 무엇'을 발견한 두 사람은 에로틱한 일탈에 빠져든다. 남자는 소녀를 사랑하지만, 소녀는 육체적 관계만 나눌 뿐이다. 그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그의 흐느낌을 만끽하며, 그에게서 화대를 받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보인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는 어린 소녀의 향기를 들이마신다.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숨, 그녀가 내쉬는 따뜻한 숨결을 들이마신다. 그녀의 육체는 점점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 육체는, 다른 몸들과 달리, 무한하다. 침실 안에서 그녀의 육체는 점점 확대된다. 정해진 형태도 없다. 육체는 매순간 생성되어, 그가 보고 있는 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 책 중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는 언제나 만들어진 이야기보다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작가는 소녀시절 베트남에서 중국인 남자친구와 교류하며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실제경험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책에서 묻어나는 광기어린 정서와 외로움은 모두 직접 체험의 소산물로 보인다.
그와 헤어지고, 열다섯 이후의 세월을 겪어낸 일흔 살의 뒤라스는 1인칭과 3인칭,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자신의 소녀시절을 재현해낸다. 중간 중간 외우고픈 문장들이 가슴에 와 박힌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난 휴가지에서 음미하며 읽으면 좋을법한 문장들이다.
"온몸에 퍼붓는 입맞춤이 나를 울게 만든다. 그 입맞춤이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울지 않는다. 그날 그 방 안에서 눈물은 과거를 달래 주었고, 미래 역시 달래 주었다. 나는 그에게 언젠가 나는 어머니와 헤어질 것이라고, 언젠가는 어머니에 대해서 더 이상 사랑을 품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운다. 그는 나를 베고 누워,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함께 운다. 나는 그에게 내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의 불행이 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 책 중에서.대개의 사람들은 과거를 끌어안은 채 현재를 산다. 이곳에 있음과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 혹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어느 때에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지만, 뒤라스는 작품을 통해 슬프고 우울했던 유년기의 일부를 복원해내기도 한다.
책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역시 명작이다. 장 자끄 아노 감독의 1991년 작품으로 제인마치와 양가휘가 출연했다. 연분홍빛 노을색 화면이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들을 묵묵히 담아낸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녀가 말했다. '나예요. 안녕하세요.' (중략)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 책 중에서사랑의 결실 따윈 없는 이야기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묘한 소설 <연인>. 어느 대중가수의 노래처럼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아름다운" 것일까? 이루어지지 않아 시리지만 아름다운 이 소설. 촉촉하고 뜨거운 여름휴가를 맞이하고픈 분들에게 추천해본다.
사랑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여름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