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중학생이 된 큰딸이 집 근처의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하던 초등학교 5학년의 여름, 2011년 7월 말. 지루한 장마 중에도 저녁나절에 비가 멈추고 선선한 바람이 불곤 했다. 한두 시간 짧게나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그때, 우리 동네 아이들은 몰려나와 여자아이 남자아이 가릴 것 없이 술래잡기·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한다.

어떤 날은 풀피리를 만들어 불고 풀잎과 줄기로 풀 목걸이와 풀 반지를 만들어 주고받으며 깔깔거린다. 어떤 날은 구슬픈 옛 동요를 서로 가르쳐 주며 돌림노래로 부른다. 먼 옛날의 동화에서 튀어나온 아이들 같다. 눈물이 날 정도로 평화롭다. 꿈결 같은 여름날이 지나간다. 이런 나날은 저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순간순간이 아릿하다.

물론 이 아이들은 21세기 소녀 소년들이라 게임을 하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고, 학습지니 학원이니 나름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끔 보내는 이 목가적인 '골목 놀이 생태계'가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우리 동네를 두고 '매일매일이 놀이공원'이라고 평했다. 어떤 아이는 가족과 함께 에버랜드나 스키장에 가서 노는 것보다 재미있다고 했다. 다들 서울 끝자락 외진 주택가의 우리 동네 골목에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놀이·자유·빈둥거림... 이게 아동인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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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몰려나와 이런저런 놀이를 하는 여름날 주택가 골목 풍경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 것일까. 아이들도 어른들도 이런 풍경이 극히 예외적이란 것을 다들 알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모습이지만, 이제 대한민국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됐다.

아이들의 옛 동요, 풀피리, 풀 반지, 술래잡기, 다방구 등등 모두 기성세대의 '향수'가 됐다. 21세기 대한민국의 500만 소녀소년에게는 학원과 학습지 그리고 <런닝맨>과 스마트폰이 있으니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놀이와 이런 자유와 이런저런 빈둥거림과 이런 웃음을 모두 '아동인권'이라 부르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죽인 다음에 자살하면 '자식 살해 후 자살'이 아니라 '일가족 동반자살'이 되는 나라에서 퍽이나 하릴없는 소리다. 그래도 11월 20일, 오늘은 세계 아동의 날이자 아동인권의 날이라는 걸 어떻게든 기념하고 싶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마다 게재될 가망도 없이, 누구의 요청도 없이, 아이들의 놀 권리와 아이들의 놀 자유와 아이들의 놀고 싶어하는 마음에 어른들이 어떻게 응답해야 될까를 고민하는 글을 작성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혹시 인권이라는 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혹시나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귀담아들을 만큼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그만큼은 우리 아이들이 놀이 속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먹고 사느라 너무 힘들고 바쁘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미래에 루저(Loser)가 되지 않고 성공하길 바란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의 행복을 보류할 막강한 권한이 있다. 까딱하면 낙오자가 될 게 뻔한데 어린 시절 잠깐 행복한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학생인권을 우스개로 여기는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행복할 권리라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아이들에게 없는 인권과 권리가 어떤 방식으로 성인에게 주어지는 지는 꽤 애매하다. 어쨌든 우리는 아이들의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성공 사이에서 잠깐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미리 끌어다 쓰면서 망쳐버린 자연과 고갈이 곧 닥쳐오는 자원 덕에 아이들의 미래니 성공이라는 게 '기껏해야 부도수표'거나 '이미 폐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일이 돼버리는데.

모든 사람은 사실 '아이'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과 적어도 10년이 지난 뒤 닥쳐올 어떤 시점을 비교하려면, 그 사이에 천문학적인 시간대의 과거를 끼워 넣어야 할 것이다. 인간 입장에서는 진화론적 시간대가 더 체감하기 쉬울 것이다. '네오테니'라는 진화론의 개념이 있다(유형성숙이라고도 한다).

이는 즉, 어릴 적 모습으로 어른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개인별로 차이는 있다. 누군가는 '내면의 아이'(inner child)가 더 드러날 수 있고, 누군가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네오테니'는 여리고 나약한 듯 보이는 성체가 크고 강한 성체보다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좋아서 진화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한다는 개념이다.

최소한 100만 년 전쯤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조상이 있었다. 인류는 인류로 진화했고, 침팬지는 침팬지의 길을 가면서 인류와 침팬지가 갈라졌다. 인간과 침팬지는 비슷하지만 인간과 침팬지의 영유아는 그보다 훨씬 비슷하다. 침팬지의 영유아는 침팬지 성체보다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인류는 두 종의 공통조상의 어릴 적 모습과 비슷하게 진화했고, 그 전략은 성공을 거둬 다른 유인원이나 다른 포유류의 생물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성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나이를 먹어도 놀이를 포기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생물종으로 생각된다.

어릴 적 모습을 유지한다고 해서 어릴 적 마음을 그대로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심은 말 그대로 어린이의 마음이며 특징이다. 동심이란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지닌다.

이로써 한 사회 전체의 동심을 관찰하고 전체 사회와 관련성을 따지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장난기·호기심·의외성에 대한 사회적 용인도를 사회적 동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심이란 말이 보통 긍정적인 내포를 가지지만, 권력과 힘에 대한 순응성과 자기중심성 및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결여도 사회적 동심에 속한다. 이를 종합해 봤을 때, 사회적 동심이 음의 방향으로 극에 달해있고 양의 방향으로는 거의 뻗어 있지 못한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지금과 다른 방향이나 모습을 찾아보려면 참조할 대상이 필요하다. 현재 내가 주목하는 나라는 웨일스다.

웨일스와 한국 서울의 차이

2012년 웨일스는 아동의 놀 권리를 입법한 최초의 국가가 됐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여성가족부 차관이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권리는 없다'고 선포한 셈이다. 이에 따라 웨일스 각 지역행정국은 아동 청소년들이 놀고 여가를 즐길 권리를 얼마나 누릴 수 있는지 매년 평가한다.

웨일스의 인구는 약 300만 명. 대한민국과 규모의 측면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정책이나 이념의 방향 그리고 질은 비교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시즌2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만들기가 놓치고 있는 것을 웨일스는 잡아냈다. 아이들이 놀지 않는데,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무슨 마을만들기고 무슨 새마을운동인가 묻고 싶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전임자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상상 어린이공원'이라는 사업을 벌였다. 당시 서울시는 서울 내 여러 곳에 알록달록 예쁜 어린이공원을 많이 만들었다(그가 벌인 사업의 공통점인 '디자인 중심의 보여주기식 사업'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성세대들은 이런 어린이공원이라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알았다. 그 예쁜 놀이터가 오래 놀 만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물론 아이들은 놀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시는 위험성 때문에 상상 어린이공원에 그네를 없애거나 밑동에 줄을 매달았다. 여러모로 예전의 전통적인 놀이터보다 재미가 없어졌거나 비슷한 수준의 공간이 됐다. 그러다 보니 잠깐 놀기에는 몰라도 오래 있으며 놀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저 어른들 보기에만 그럴듯한 것이었다.

현재 서울시가 행하는 마을만들기 사업도 행여 이렇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나는 마을만들기 사업이 성공하길 바란다. 아이들이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길 원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아이다. 우리가 아이인 채로 행복하게 살려면 보다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